멸종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로스 다우댓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위대한 기술 변화는 파괴를 동반했고, 새로운 질서는 낡은 삶의 방식을 쓸어버렸다.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의 디지털 혁명은 전에 없던 전면적인 도태를 예고한다. 인류는 진화 생물학자들이 '병목 현상'이라 부르는 급격한 압박기에 들어섰다. 문화, 관습, 민족이 멸종 위기에 처한 시기다.
대학생이 스마트폰 화면 크기를 넘는 문단을 읽기 힘들어하고 할리우드가 유튜브와 틱톡에 밀려 고전할 때, 이는 소설, 영화 등 전통 예술 형식을 위협하는 병목 현상이다. 일간지, 주요 개신교 교단, 전통 친목 단체가 사라지고 좌식 식당, 쇼핑몰, 대학마저 같은 하향 곡선을 그릴 때, 바로 그것이 교외 중산층의 낡은 삶을 조이는 병목 현상이다.
중도파가 세상이 자신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의아해하고 미래가 2차 세계대전 수정주의자 같은 별난 형태의 급진주의자들에게 넘어간 듯 보일 때, 바로 그것이 기존의 합의 정치와 수동적인 정치 참여 방식을 붕괴시키는 병목 현상이다. 젊은 세대가 연애, 결혼, 출산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인간 제도를 위협하는 병목 현상이다.
사람들이 짝을 이루고 번식하지 않아 국가가 늙고 쇠퇴하며 사라질 때, 예견된 대로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유럽에 인구 감소가 휩쓸 때, 그것은 병목 현상의 최종 단계이자, 문자 그대로의 소멸이다.
인터넷이 기존의 많은 것을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낯설지 않다. 블록버스터 비디오(비디오 대여점), 공중전화 등 디지털 전환의 초기 희생자들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잠재적 멸종의 규모는 여전히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러한 멸종이 자발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일반적인 진화적 병목 현상은 전염병, 기근, 지진, 홍수, 운석 충돌 같은 즉각적인 물리적 위협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다.
디지털 시대의 병목 현상은 다르다. 새로운 시대는 사람들을 현실에서 가상으로 유인해 일상생활을 지탱하는 활동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는 인간적인 삶의 방식 자체를 구식으로 만들며 우리를 서서히 죽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의도적이고 강렬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의식적인 고민 없이 저절로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문화의 모든 측면은 온라인 속어 'NGMI(Not Going To Make It,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사라질 운명이다.
언어는 사라지고, 교회는 소멸하며, 정치 이념은 증발하고, 예술 형식은 사라진다. 읽고 쓰는 능력과 수학적 사고 능력은 시들고, 종족 번식마저 실패할 것이다. 다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 의도적이고 열성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은 예외다. 단순히 별난 행동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파괴적이거나 결국 실패로 끝날 저항과 급진주의도 존재한다. 하지만 평범하고 안일한 태도는 치명적이다.
이러한 묘사가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이는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저항하며, 인간적인 가치와 인간 존재가 살아남아 번성하는 미래를 위해 싸우자는 권고다. 이는 무기력한 표류에 맞서 의도적인 행동을, 수동성에 맞서 목적의식을 갖고, 궁극적으로 멸종에 맞서 삶 자체를 지키자는 호소다.
◇치명적인 진행
먼저 우리가 무엇을 겪는지 이해해야 한다. 변화는 대체에서 시작된다. 디지털 시대는 현실을 가상으로 옮겨,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과 활동이 물리적 공간을 넘어 컴퓨터 화면에서 이뤄지게 했다.
물론, 이러한 대체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터넷이 거리의 제약을 허물면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지적, 과학적 작업이 가능해졌다. 원격 근무는 사회적 교류를 줄일 수 있지만, 가족의 삶에는 큰 도움이 됐다. 긴 팟캐스트가 온라인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은 문자 문화에서 구술 문화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점점 짧아지는' 일반적인 흐름에 대한 반례가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가상 대체물은 원래 것보다 질이 떨어진다. 스트리밍 알고리즘만 봐도 과거 영화나 20년 전 황금기 TV 쇼보다 예술적 수준이 확연히 낮아졌다. 북톡(BookTok)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온리팬스(OnlyFans)가 낭만적 사랑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 온라인 지역 뉴스 매체는 사라진 인쇄 신문 생태계에 비해 전반적으로 형편없다. 온라인 우정은 현실 관계보다 얄팍하고, 온라인 데이팅은 이전 시대의 데이팅 시장보다 성공적으로 짝을 맺어주는 경우가 적다. 온라인 포르노… 내 말뜻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는 현혹의 힘으로 성공하고 심화됐다. 새로운 형태가 기존 형태보다 열등하더라도, 중독성이 더 강하고, 즉각적이며, 접근하기 쉽고, 위험 부담도 적다. 스와이프 기반 온라인 데이팅은 배우자를 찾을 가능성이 낮지만, 현실에서 유혹하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비디오 게임은 현실 스포츠나 게임과 같은 신체 경험을 제공하지 않지만, 아드레날린 분출은 항상 가능하고, 플레이 시간에 대한 제약이 적다. 소셜 미디어의 무한 스크롤은 좋은 영화보다 못하지만, 눈을 뗄 수 없고, 소설은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에 비해 무척 읽기 힘들다. 포르노는 섹스보다 못하지만, 상대를 찾을 필요 없이 원하는 것을 언제든 환상으로 제공한다.
결국 사람들은 가상 대체물에서 얻는 것이 적더라도, 계속 그것에 의존하게 됐다. 그 결과 디지털 환경에서 사회생활은 약화됐고, 로맨스는 감소했다. 기관의 지지 기반은 흔들렸고, 순수 예술은 시들었으며 대중 예술은 저급함으로 넘쳐났다. 우리 문명이 당연하게 여겼던 기본적인 기술과 습관, 즉 긴 대화, 이성과의 교류, 영화나 책에 몰입하는 능력 등은 다음 세대로 희미하게 전수될 뿐이다.
그러다 마침내, 지역의 실재하는 경험이 가상 대체물보다 덜 중요해지면서 대체와 현혹의 힘은 현실 세계의 삶이 근본적으로 구식이라는 인식을 부추긴다. 온라인은 구식화에 대한 인식이 덜한 강력한 하위문화나 틈새시장을 허용했다. 하지만 가상 세계를 떠도는 평범한 인터넷 사용자는 주변보다 중심을, 지방보다 대도시를, 일상보다 유명인의 드라마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 결과, 국가 정치는 엄청나게 중요해 보이고 지역 정치는 무의미해졌다. 영어가 유일하게 알아둘 가치 있는 언어 같고,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세계 대통령 선거처럼 여겨진다. 작은 나라와 지역 문화는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고, 사람들의 마음속 친구와 이웃 자리는 유명 인플루언서가 차지했다.
이러한 실망감은 자유 민주주의에 특별한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다. 자유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과 평범한 시민의 중요성에 대한 평등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반인본주의가 유행하고, 자살과 안락사 확대를 부추기는 충동이 생겨났다. 특히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에서는 개인적, 문화적 무의미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한때 역사가 이곳에서 펼쳐졌지만, 이제는 미국과 휴대폰 안에서만 일어나는 느낌이다. 그러니 왜 사람들이 이탈리아 시골이나 일본 농촌, 카리브해 섬, 발칸반도나 발트해 연안에서 굳이 미래를 건설하려 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 우리의 궤적을 묘사하며, 방금 설명한 모든 힘은 인공지능이 우리 삶을 더 많이 재편할수록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면 인간은 경제적, 사회적, 예술적, 지적으로 쓸모없어지거나 구식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마치 디지털 시대의 모든 흐름이 이런 결론을 향해 달려온 것만 같다.
◇얼마나 살아남을까
내가 묘사한 현상들이 보편적이지는 않다. 진정한 AI 종말론자들의 예측이 틀렸다면, 2100년에도 국가, 가족, 종교, 아이, 결혼, 위대한 책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연애하고 사랑하며 결혼하고 출산하는 선택, 특정 국가와 전통, 예술 형식, 세계관을 위해 싸우는 선택, 가상에 대한 노출을 제한하는 선택, 즉 새로운 기술을 반드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모든 환경에서 우리가 기술의 주인이 되려 노력하는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은 자유주의자에게 특히 어렵다. 배타적이고 광신적이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인류 전체에 대한 막연한 애정보다는 자신의 친족을 명확히 선호할 때만 유지된다. 중요한 예술 형식은 노골적인 엘리트주의, 즉 차별성을 고집하고 평범함을 경멸할 때만 살아남는다. 종교는 어떤 형태이든 신전통주의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때만 생존한다. 작은 나라들은 21세기 주민들이 현재 해체되는 '역사의 종말'적 세계시민주의 대신, 19세기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나 젊은 투르크인, 초기 시오니스트 같은 국가 건설자들의 정신을 되새길 때만 살아남을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는 인터넷 이전부터 약화된 이러한 강한 열망을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과 인간의 필요, 의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포용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살아남아 번성할 것이다. 반면 비자유주의자들은 실제 결과를 따지지 않고 급진주의와 파괴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뚜렷한 포퓰리즘의 경향과도 일치한다.
또는 기술이 만든 위기를 기술로 빠르게 해결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설령 그 해결책이 비인간화와 권위주의를 결합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가령 인공 자궁을 통제하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을 상상해보라-산아제한). 혹은 평범한 사람의 도태, 평범함의 사라짐, 지방과 변두리의 공허함을 단순히 수용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AI 하이브리드의 새로운 지배 종족이 물려받을 것이라는 이론에 따라서 말이다.
하지만 가장 큰 유혹은 자신이 어떤 급진적인 프로젝트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가상적이고, 보여주기식이며,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에 다시 끌려들어가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필자에게도 익숙한 얘기다. 내 직업 생활은 대부분 온라인 활동이며, 나와 같은 우려를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현실로 나가 행동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자. 종교를 실천하자. 학교를 세우자. 지역 극장, 박물관, 오페라 또는 콘서트홀을 지원하자. 비록 유튜브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더라도 말이다. 붓을 들고, 공을 잡고, 악기를 연주하자. 언어를 배우자. 앱이 있더라도 말이다. 운전을 배우자. 곧 웨이모나 테슬라가 우리를 위해 운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묘비를 세우자. 죽은 이를 그저 화장하지만 말고. 그리고 아이와 함께 앉아 책을 펴고 읽자. 병목 현상이 조여올수록 다시 한번 고대의 훈계에 귀 기울여야 생존할 수 있다.
*다우댓은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며 '믿음: 우리는 왜 종교적이어야 하는가'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