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hovyStock | 15-08-10 02:06:21 | 조회 : 1701 | 추천 : +1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술기운이 하루 이틀 도졌을 때, 문득 사귀자고 말했던 것보다 수십 배는 쉬웠다.
딱히 취해있지도 않았고 감정이 격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마치 그것이 예의인양, 반드시 말해야만 되는 것처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그
녀가 부디 제대로 들을 수 있게 천천히, 또박또박.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마지막 통화에서 그녀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을까.
아주 쉽게 말하고, 아주 쉽게 이별했다. 그렇게 통화를 끊고서야 비로소 사랑조차도 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게 쉬웠구나.
초장부터 끝이 보인 영화처럼, 우습고 허탈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말했듯, 모든 것이 쉬웠기 때문에. 그저 쉬운 거짓말과 쉬운 감정의 장난이었는데 슬퍼하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스스로 질문을 바꾸었다.
왜 문제가 있는 걸 몰랐을까.
그녀와 나 사이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관계였다.
오히려 자주 다투거나, 감정이 격해질 때까지 말씨름을 했더라면 좋았을 걸 싶을 정도였으니.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라운지 카페에 앉아 수다나 떨고 있지 않았을까.
또 남자 가수에 푹 빠진 그녀에게 질투 섞인 투정을 부리면서 따듯한 마끼야또를 주문하지 않았을까.
실상 그녀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터치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단둘이 있으면 대화가 될 리가 무방했다. 실제로 과묵한 커플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분명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대화를 많이 한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나와 그녀가 처음만난 날일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렇다. 신촌역 9번 출구 근처 술집에서 동기들과 술을 마실 때, 그녀는 내게 대뜸 시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이내 찾아 읽진 않지만 좋아는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취기가 올라왔는지 발그레 해진 그녀의 두 볼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고만 싶은 볼, 입술 양옆에 빠끔 고개 내민 보조개, 그리고 웃을 때 살짝 보이는 앞니까지.
술집에 흐르는 발라드 가수의 목소리보다 그녀가 보내는 시선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린 막차 시간이 한참 지나서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헤어진 후 첫날 째, 그녀가 꿈에 나왔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내게 손을 잡아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녀의 손은 작고, 부드럽고, 따듯했다.
힘을 조금이라도 주면 바로 망가져버릴 것만 같은, 여리디 여린 아기의 손처럼. 나는 그런 손을 잡은 채, 그녀와 함께 명동의 거리를 쏘다녔다.
액세서리 가게에 들려 커플 팔찌를 맞추기도 하고, 유명한 돈가스 집을 찾아 헤매기도 했으며 끝내 찾은 그 집에서 만족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다.
“사귈까?”
다시 신촌역 9번 출구에서 그녀와 나는 마주앉았다.
소주 두 병에 감자튀김 안주가 결코 풍족한 술자리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쉼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안주였으니까.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입에선 그동안 하지 못해 근질근질했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결코 취기에 무의식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언젠간 해야 될 말이었으며 따지고 보면 우리 사이의 유일한 진심이었다. 그러니 당시엔 대답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한 건 처음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아니, 나밖에 모르고 있다. 그만큼 그녀를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틀 째,
더 이상 울릴 릴 없는 핸드폰 화면에선 하염없이 시간만 바뀌고 있다.
혹시 모두 꿈이었을까. 길고 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서 ‘다행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렴, 나도 그럴 일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너무 생생하지 않은가. 처음 만나던 날도, 처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첫 데이트를 하며 슬쩍 잡던 손까지,
당장이라도 눈을 감으면 다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다만, 그녀에게만은 처음이 아니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처음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아니라면 무엇을 하든지 불공평한 게 사실이다.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고 겨우 며칠이 지났을 때, 그녀는 이미 나에 대한 설렘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나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처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서툴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지켜만 보고 있다 결국 실수를 하게 된다.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다만 내가 궁금한 건, 과연 그녀는 내게 단 한 번이라도 설렌 적이 있었을까.
혼자 하는 소꿉놀이는 재미가 없다. 내가 모든 역할을 도맡아서 하면 얼마나 힘들까.
아빠 역할과 엄마 역할은 목소리 톤과 말투까지 바꿔야 한다.
아이 역할은 또 얼마나 귀찮은지,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 마찬가지로, 혼자 하는 사랑 또한 그렇다.
그렇게 그녀는 몇 달 만에 바뀌어갔다.
어쩌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선 어쨌거나 바뀌고 있었다.
전화도 줄었고, 거짓말도 늘었으며, 나와 같이 있기를 꺼려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염없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아무 내색하지 않으며. 그저 평소와 같이 웃으면서 기다렸다. ‘이제 오는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끝내 그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처음으로 진심을 말했고, 나는 그것 자체로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래,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희미했던 의미인데 시간을 끈다고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헤어져야지.
사흘 째,
헤어진다고 모두 잊을 수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 같은 거리를 걸어도 그녀가 생각나는지, 잘 모르겠다. 밥을 먹다가 문득 그녀가 좋아했던 반찬을 보면 또 생각난다.
그녀와 통화하면서 보았던 예능 방송은 여전히 재밌고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영화는 아직도 보지 못한 채이다.
과연 그녀도 이럴까. 에이, 처음부터 그러질 않았는데 헤어졌다고 바뀔 리가.
나만 당한 것 같고 억울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다.
나에게도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생겼다. 결코 좋다고만 할 수는 없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때만큼이라도 다른 이를 생각해보고, 먼저 연락을 하고, 걱정을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 다행이다. 또 고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나 또한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사랑을 해봤다, 라고.
너는 아니겠지만,.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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