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갤러ㅇ | 22-05-10 21:52:30 | 조회 : 3419 | 추천 : +5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이란?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를 기념하여 매년 뛰어난 만화를 선정, 시상하는 상.
199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아사히 신문이 주관한다. 만화계에서 상당히 권위있는 상이다.
「치.」 우오토 씨가 말하는 지동설 이야기로 그린 지성과 폭력의 차이
"치. - 지구의 운동에 대해서-" 작자 우오토 씨 인터뷰 <전편>
중세 유럽을 무대로, 이단으로 여겨진 지동설의 연구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사람들을 픽션으로 그린 우오토 씨(24)의 만화 「치.-지구의 운동에 대하여-」가 제26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아사히 신문사 주최)의 만화 대상을 수상했다. 24세 만화 대상 수상은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역사상 최연소다.
「치.」는 이번 달 18일에 잡지 연재가 끝나, 완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인터뷰 전편에서는, 「지성과 폭력」을 그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최종화까지의 전개 의도, 종반의 인상적인 그 대사 등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7명의 사외 전형위원 만장일치였습니다. 수상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놀라서 지금은 현실감이 별로 없어요.
―――데즈카 오사무 씨의 이름을 딴 상입니다. 데즈카 작품의 인상은?
만화를 그리다가 그 이름이 붙은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마음이 가다듬어 집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애니메이션 '블랙잭'이 방송되고 있었는데, 데즈카 오사무 작품은 가까이 있는 콘텐츠로서의 만화라기보다는 '교양으로서의 문학작품'의 하나랄까, 그런 역사적인 물건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전쟁 세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성이 있고 위엄 있는 한편, 그래도 그게 진부한 건 아닙니다.
지금도 데즈카 선생님의 인터뷰를 보면 그것이 터무니없이 재미있고 보편적인 시각이 있고 액츄얼하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 점에서 데즈카 선생님께는 요즘 말하는 "만화가"라기보다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기사 후반에서는, 아돌프·아이히만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 이단 심문관 노박의 캐릭터 조형이나, 최종화까지의 전개의 목적, 「그것이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렸다」라고 하는 어느 대사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치.」 집필의 계기는.
'지성과 폭력'에 관심이 있었고, 그게 짙게 나오는 모티브를 찾았을 때 '지동설'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지동설은 단순히 박해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복잡한 역사적 경위가 있죠.
그 자체가 되게 재밌다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어 사실은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사실 하지 않은 말'이 이만큼이나 유포되어 있어서 굉장히 일반적인 상식 감각이 되어 있다. 라는 픽션이 현실에 영향을 미쳐 일체화가 되어 버린 점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문학」에도 가까운 이야기랄까, 때로 역사적 사실보다 가짜 역사가 더 영향력을 갖는다. 그러한 픽션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테마구나, 라고 느꼈기 때문에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그런 분야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셨나요?
대학은 2년 만에 그만둬 버렸습니다만, 철학과였기 때문에 그 영향은 있을지도 모릅니다.전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고등학교 윤리 수업에서 철학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랄까, '재미있구나'라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느낌을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지성과 폭력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차이가 재미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로 볼 때 지성과 폭력이 분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죠. 예를 들어, 반 안에서도 지성은 반장이며 폭력은 양아치 같은 느낌으로 나뉜 존재가 되어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어있어서 학문연구와 육체적인 처벌같이 폭력이 가까운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언더그라운드나 거리에야말로 자유로운 지성이 있기도 하죠. 이 혼연일체함이 불균형적이고 갭이 있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반대로 보면 현대에도 지성과 폭력이 언뜻 분리돼 있지만 그것은 불가시화돼 있을 뿐, 뿌리는 언제나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풍자이면서 현대를 희미하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지동설에 매료된 주인공들이 줄줄이 세대를 초월하면서, 가는 실처럼 이어지며 끝내는 코페르니쿠스까지 가는데 뭉클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결말에 도달하기 위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할까 하는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것은 "한 시대에서 한 천재가 무엇인가를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계승되어 환경적인 조건이나 데이터의 축적 등이 갖추어진 후 단숨에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 실제로 세상에도 세계가 바뀔 때까지는 많은 천재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나 장소를 초월한 콜라보레이션이라는 것이 아카데미즘이나 인간문화의 재미있는 점이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그걸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이야기의 구성이 되었습니다.
―――캐릭터 묘사에서 의식한 것은.
선과 악의 이원론이 되지 않도록 의식했습니다. 지성과 폭력의 차이라는 것은 굉장히 근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밖에 없는데, 그건 「망설이다」 라는 게 이 작품의 생각입니다.
망설임이 있기에 생각할 수 있다. 지성의 본질은 방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망설일 수 없지만, 인간은 헤맬 수 있는 존재이고, 그것은 인간만이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훌륭함 같은 것을 찬양하는 것으로 가지고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폭력이란 망설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위력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위험한 쪽으로도 쏠리기 마련이죠. 작중의 캐릭터 자체는 지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과 폭력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큰 틀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동시에 한 사람에게 양면이 있는 쪽으로 의식하며 그렸습니다.
노박이라는 이단 심문관은 폭력적인 편에 속하지만 지적인 쪽에 속해 있는 라파우나 오클지 등의 주인공 진영도 무언가를 결단하고 진행할 때, 그 결단이라는 것은 폭력적입니다. 전체적으로 그런 식으로 폭력적 결단으로 나아간 등장인물들이 최종적으로 헤맨다는 결론을 가진 캐릭터에 도달한다. 그 흐름을 각 주인공들을 통해서 그리고 싶었어요.
―――초반부터 막판까지 나오는 노박은 뒷주인공 같았어요.
처음 캐릭터 조형의 모티브로 삼은 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알려진 아돌프 아이히만(※홀로코스트의 중심 인물. 한나 아렌트가 재판 기록을 썼다)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흔히 말하는 것이 평범한 악이라고 할까, 퍼내틱(광적인)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고가 정지되어 톱니바퀴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체제에 따라 폭력적인 일을 해 버린다는 지적. 그 인물상을 참고해서 썼습니다.
그런 것도, 그러한 캐릭터는 사이코패스 캐릭터처럼 되어 버릴 우려가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고문 즐겁다」같은 사이코 캐릭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른해」라고 말하며 일을 하는 샐러리맨같은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협박하는 방식이나 업무처리를 효율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고, 감정적인 캐릭터인 것은 아닙니다. 쉽게 처리될만한 안건이라면 기뻐하겠지만요(웃음)
단지 단순하게, 고문을 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인 평범한 사람. 그 섬뜩함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편이 훨씬 무서운 일인 것 같아서요.
―――이야기 전체의 주제와도 통하는 부분인지는 모르지만 57화에서 노박이 죽을 때, 초반에 죽은 라파우의 환영이 나타나 「비록 서로 죽일 만큼 미워해도 같은 시대를 만든 동료인 것 같다」고 하죠.
확실히 종반은 그것을 말하기 위한 작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의 1화, 2화의 콘티를 올려 연재가 결정 됐을 때, 그 대사가 생각났는데, 그 때, 「이것으로 이 작품을 끝낼 수 있다」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잘 알지도,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수업에서 역사 이야기를 들을 때나, wiki 기사를 읽을 때, 모두 먼 옛날 이야기여서, 큰 전쟁 같은 것도 이야기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감각을 대사에 넣고 싶었어요.
물론 그런 걸 현대인이라서 할 수 있는 조잡하고 충동적인 대사이죠. 직면했을 당시의 당사자들이라면 장난치지 말라는 얘기를 했겠죠,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한 현대인인 제가 역사를 소재로 한 것 속에서 쓸 수 있고 써야 할 대사라고 느꼈습니다.
역사라는 틀에 박힌 관계성은 이해 때문에, 현실에 있던 실제 관계성보다 훨씬 단순해집니다. 그건 잔혹하지만 저는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그걸 희망이라고도 생각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즉, "어떤 극한 상태에서든, 적대 관계여도, 동료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인간에게는 항상 남아 있다"는 감각을 상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싸우더라도, 시간을 두고보면 같은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는 유대감, 즉 '존재했다'라는 유대감은 분단이나 단절의 마지막 방파제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극소하지만 포섭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 공통점을 계기로, '그렇다면 다른 곳이라면, 다른 시대라면, 그 상대와 더 가까운 친구였을지도 모른다며', 부처 같은 자애와 엠파시를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지구에서 태어난 동료라는 것은 유치한 발상이라고 하면 수긍합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우주선 지구호 같은, 큰 이상론을 믿습니다.
물론 이 생각은 가해, 피해를 상대화시켜, 죄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 생각을 현실적인 문제에 적용시켜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끝을 어딘가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역사를 봤을 때 느끼는 이야기성이자 픽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화에서는 알베르트가 「은닉도 배제도 유효하지 않았다」 「우리는 부족하다. 그러니까 서로 보충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폴리스)인 동물이다」 「의심하면서 나아가고. 믿으면서 돌아가고. 아름다움에 반짝임을 계속 다가갑니다」라고. 그때까지 연면과 연결된 이야기의 답이 거기에 집약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 천재가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싫든 좋든 모두가 협력하죠.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면서 세계는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은 잡스라는 사람이 우연히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위나 지금까지의 역사 등을 근거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죠. 물론 그것을 돌파하는 인격의 우유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모두가 협력해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식이 극히 단순하게, 개인적인 취미라고 할까, 좋아하는 거죠. 옵티미스트(낙관론자)의 외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적 동물'은 참 좋다고 날이 갈수록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들었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알 것 같은데 모를 것 같은, 문자로선 이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활동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가 뭐야」라는 느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벽창호 젊은이지만, 그래도 그야말로 「치.」를 읽어주거나, 여러 사람에게 협력받을 기회가 늘며, 조금,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물적인 무리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사회라는 범위. 그 자연본능의 범주를 뛰어넘는 느낌이 기적 같아서 좋아합니다. 그럼 카오스가 되는 게 당연한데, 아슬아슬하게 협력하여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게 멋집니다. 그걸 잃으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릴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런 사회적으로 있어라, 라는 건 너무 싫어서 느긋히 개인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죠.
"치." 우오토 씨, 나는 독실한 놈이라도 만능 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치. - 지구의 운동에 대해서-" 우오토 씨 인터뷰 <후편>
―――퀵 재팬(vol.159 太田出版)의 인터뷰 기사에서 스탠드 얼론(고립적인 치知)과 콤플렉스(집합적인 치知)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양면성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원래 저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할까, 부활동에도 들어가지 않고, 만화가 지망생 친구들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애초에 지금도 고향 친구나 고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에게 만화가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그건 그렇다 쳐도, 혼자 틀어박혀서 누구의 영향도 받고 싶지 않은 타입이었습니다. 당연히 협력이라든가 콜라보레이션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것과 동시에, 저의 학창시절에는 SNS시대라기보다, 의견을 말하는데 매개가 필요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피어 투 피어(※Peer to Peer, 인터넷상에서, 서버를 통하지 않고 정보를 단말끼리 교환하는 기술)로 개인이 하면 되잖아, 라고 하는 시대였습니다.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개인의 시대다!' 같은. 물론 사상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있었겠지만, 그야말로 고등학교에서는 다들 아이폰을 쓰거나 유튜버라거나 인플루언서 이런 말을 듣게 되거나 물리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밑바탕이 갖춰져서, 실제 사례가 나올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사 후반에서는, 어느 캐릭터를 최후반에 등장시킨 목적이나, 연재를 끝내고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하는 최근의 일상, 향후 그리고 싶은 작품 등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혼자 힘으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개 없이 이어지는 게 편리하고, 살기 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설픈 앙시앵 레짐보다 당연히 나았죠. 혜택을 주면 끝이 없겠지만, 그래도 그게 모든 것에 적용 가능한 만능 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중고교생일 때, 만화책을 그리는 사람 중에서 출판사라든가 편집자 불필요론이 조금씩 목소리가 커졌죠. '만화가 혼자 올리면 되고, 팬이 몇백 명 있으면, 그 사람들이 1만엔씩 내주면 먹고 살 수 있으니, 그거면 되잖아'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사회 안전망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런 길이 생겨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출판사라든가 편집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태어나는 협력 구조라든가, 사회가 엮이며 태어나는 것, 매개체가 들어와서 발신하는 것, 다른 사람이 「편집」해서 출판하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매스미디어가 권위도 아니게 된 시대에…그렇다고 해도 아직 권위적이지만, 뭐 그런 세상이어야 매개체가 필요한 기존 시스템에서 표현의 본질적인 가치가 시험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피어투피어로 직접 닿는 서비스는 포퓰리즘에 매우 친화성이 높았던 셈이어서, 표현의 다양화라기보다 획일화를 촉진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 상황에서 포퓰리즘으로도 빠지지 않고 권위적으로도 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팀이라는 단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력'과 '협력' 두 면이 이 작품의 주제였습니다. 아까부터 주제 얘기만 너무 많이하는 느낌도 드네요(웃음)
―――요즘 SNS 같은 걸 보면 이게 선인가, 악인가, 하는 단순한 이원론에 빠지기 쉬운 것 같아요.
원래 뭐가 옳고 뭐가 잘못됐냐는 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클지의 '스스로 틀렸을 가능성을 긍정하는 자세라는 것이 학술이나 연구에는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대사나 마지막에 알베르트의 대사로도 이어지는 것 같은데, 진리 앞에서는 겸허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를 맹신해 버리는 것의 위험성이나, 적당히 여러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해야 한다든가 말이죠.
그것은 균형을 잡는다는 점이 좋겠죠. 단지 그것도 말하자면 상대주의이고 냉소주의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언가에 열광하고 균형따윈 신경 쓰지 않고, 믿는다는 강함도 저는 굉장히 좋아하고, 저 자신도 그렇기 때문에 그 가치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이 주제의 경우가 되었을 때는 '균형'이라는 결론으로 그려버렸고,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릴 수 있었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진일퇴하는 점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연구자의 대단함이라고 생각하고.
그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겠다는 아이러니컬한 자세 같은 것도 굉장히 멋있고, 상대주의도 상대라는 점에서 절대라는 패러독스에 빠지고, 그것은 냉소를 넘어 뜨겁습니다. 일진일퇴나 균형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이고, 그 자체가 두터운 신앙이기도 하며, 래디컬(과격)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작 연재 전후 표현의 자유나 학문의 자유가 문제가 되거나 신종 코로나가 유행하거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있어, 러시아 내에서 보도가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현대적인 사건과의 연결도 작품의 힘으로 감지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사건과 겹쳐진 것에 의식되어 있었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작 시 의식한 것은 딱히 없습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꽤 오래 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본작뿐만 아니라 전작도 그렇습니다만, 보편적인 이야기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어느 시대나 현실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최초의 데즈카 선생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인터뷰 전편), 보편적인 이야기는, 모든 시사 문제에 관련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 앞에 명작에는 각 작가 나름의 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저는 너무 좋아요. 문제제기만 하면 꽤 잘한 것 같아요. 하지만 거기서 한발 나아가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대답 같은 것을 넣으며, 그것이 역시 이야기, 만화를 "사람"이 만드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되돌리면 시사적인 문제를 의식한 적은 없었는데, 그냥 현실적인 열린 작품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연관성이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렌타가 연구기관에서 여성 차별을 받는 장면은 현실과 관련돼 있나 싶은데요.
그곳은 가장 짙고 현실, 현상이 반영된 묘사이긴 하다고 생각합니다. 3권에서 콜베라는 캐릭터가 요렌타의 논문을 도용해버립니다. 처음에는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 차별주의자로 그렸거든요.
단지, 협의를 하며, 지금 여성 차별을 그리는 것이라면, 그러한 캐릭터는 아니지 않을까,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틀에 박힌 차별주의자를, 남자인 내가 그리는 것은 당사자성으로부터 회피했으며,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설교같은 느낌이 나는 묘사가 되어 버릴 우려가 있었고, 단순하게 식상해지죠.
그래서 여성의 권리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근저에 있는 차별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차별할 수밖에 없다는 캐릭터로 변경했습니다. 그 캐릭터가 나쁘다기보다는 사회적 구조 때문에 그렇게 돼 있다는 느낌의 묘사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콜베라는 건 당시 사회에서 보면 굉장히 진보적인 캐릭터랄까, 리버럴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인데, 그것의 한계가 보여주는 잔혹함 같은 걸 그리고 싶었어요.
저 자신도 분명 무자각하게 퍼터널리즘(부권주의)이라고 할까, 콜베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성과 자책도 담아, 이런 조형이 되었습니다.
―――막판에 알베르트의 과외 선생으로 라파우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1권에 나온 라파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요?
독자 분의 해석에 맡기겠지만, 제 해석으로는 1부의 라파우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라파우와 아주 비슷한 내면과 외면을 하고 있지만 라파우는 죽었기 때문에 라파우는 아닙니다.
―――알베르트에게 마지막에 깨달음을 주는 사람으로거 굳이 저런 인물을 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고 할까, 이 작품은 마지막엔 라파우와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라파우는 처음에 나온, 바로 이 작품의 얼굴이라고 할까, 상징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라서 자살해버렸죠.
「지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겠다」라고 하는 테제와 최종적으로 대치하지 않으면, 이 작품이 완성되어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파우의 강함과 위험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마지막에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그 부분만큼은 이야기의 리얼리티 라인이 달라졌다고 할까요, 라파우가 아닌 캐릭터지만 라파우 자체의 한 면이기도 한 셈이죠. 도중에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할까, 머리를 검게 할까도 생각했었지만, 라파우 이외에는 라파우의 가해성을 표현시키는 것이 그 캐릭터에게 더러운 일을 떠넘기는 느낌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기는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다른 캐릭터' 같은 이화효과랄까, 본질은 같지만 다른 인상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제1부의 라파우는, 종교에 손상된 것을 학문에 의해 회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알베르트는, 학문에 의해 손상된 것을 종교에 의해 회복하는 것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라파우 같은 적이 이런 주제인 작품의 라스트 보스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회까지 읽고 목숨을 걸고 진리를 이어온 사람도 물론 있지만, 목숨을 희생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되지 않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자체에 매력도 있습니다만, 동시에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나 할까요. 한 개인의 결단으로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람을 향해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배제한다는 걸 이겨낸 끝에 희망이 있고, 그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게 이 작품의 결말로 만들고 싶었어요. 좀 치사하지만요(웃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경위는.
만화같은 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자유장에 그려왔습니다.
투고를 시작한 건 중1쯤. 부활동 같은 것도 안 하였고.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TV에서 애니메이션 「바쿠만」을 보고, 이런 방법으로 하면 만화가가 될 수 있다고 배우고, 부활동도 하지 않고 투고해 본 것이 시작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거의 개그만화만 읽었어요.
「돌격!! 크로마티 고교」에는 굉장히 빠져있었습니다. 노나카 에이지 선생님은 정말 좋아해서 몇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그 후, 후쿠모토 노부유키 선생님의 카이지를 읽고, 이런 것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죠. 굉장히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는 후쿠모토 선생님의 작품에 푹 빠졌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기생수」라든가 「사채꾼 우시지마」이라든가 「핑퐁」, 「아인」 등을 읽고, 각각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스토리 만화를 그렸나요?
아뇨, 그게 계속 개그 만화를 좋아해서. 코미디도 좋아해서 개그를 하고 싶어서,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개그를 계속 그렸는데, 매거진 담당자가 대사가 재미있으니까, 스토리도 해보라고 해서 고3쯤에 처음으로 스토리물을 그렸습니다. 그때까지 스토리 같은 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개그 쪽이 더 어렵다는 느낌이죠.
―――필명의 유래는.
갯장어(鱧)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웃음). 초등학교 때 먹은 것이 너무 맛있어서, 그 이후로 먹지 못했지만, 계속 애타게 그리워했기 때문에 필명으로 지었습니다.
―――이번 달 잡지 연재가 끝났습니다. 요즘은 어떤 일을 하세요?
정말 쓸데없는 얘기지만, 지금까지는 질질 유튜브 같은 걸 보다가 요즘은 매일 수영장에 가고 있어요. 500미터 수영을 하고나면 몇초만에 돌아가는데, 그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그 후 가끔 야키소바를 만들어 먹는 경우도 있군요. 최고예요. 요즘 망설임 없이 붉은 생강을 사게 되는데. 야키소바에 넣으면 정말 맛있어요.
―――수상을 받고 앞으로의 마음가짐은.
상에 부끄럽지 않은 만화를 그려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기죽지 말고 앞으로도 느긋하게 재미있는 것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차기작 구상은?
구상 자체는 있는데, 만들지를 전혀 모르겠어요. 유행의 테마라고 하면, 유행의 테마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인터뷰에서 봤는데 「SNS로 비난하는 걸」 다룬 만화라던가.
그거 한 번 패스했어요. 너무 어려워서요. 그저 그 요점과 상통되는 걸로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등장인물들이 열중하는 것이 100m나 지동설이고 다수파의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반대도 그려보고 싶어서요.
근데 지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내일 갑자기 생각나서 그리고 있을 가능성에도 기대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는 만화가가 되고 싶나요.
재미있는 것을 그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최근 그것과 플러스로 생각한 것은 「영혼이 있는 만화」입니다(웃음). 추상적이지만, 그래도 그것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영혼이 없는, 이상한 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단순해도 되니까 라기보다는 단순한 것이 좋으니까 영혼이 있는 만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진심을 말하고 있는 만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식하고 싶은 것은 발가벗은 마음과 본심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전부 발가벗는 것, 자신의 삶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본심이라는 의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그런 건 자의식이랄까, 수치심이랄까, 정신분석적인 무의식이라든가, 충동적인 감정을 일부러 드러낼 정도의 사소설적인 것을 쓰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제 안의 욕망과 그에 더해지는 이성으로 이상을 향해 가는, 그런 것들이 인간의 본심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영혼이 있다고 착각할 정도의 만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IllllIlIllll3년 전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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