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 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독후감 1편 [4]

5 가람휘 | 2020-03-29 22:17:18 | 조회 : 239 | 추천 : +3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유한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절망으로부터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으로 생각했다. 그가 이와 같이 신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고, 절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강요받은 근본주의적 기독교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와 같이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귀결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를 긍정하고자 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앞에 선 단독자라는 개념이다.

 

키에르 케고르에 따르면, 절망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감정이며 절망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기인한다. 절망이 강화되는 이유는 외부 환경에 대한 욕망 때문인데, 자유의지가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을 못하니 무력감이 생겨나고 절망이 강화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결과를 낳는다. 절망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는 상태다. 절망은 모든 인간이 맞게 되는 숙명이기에 그러하다.

 

절망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가족친구와 같은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 쾌락, 리비도와 같은 육체에서 비롯된 쾌락에만 몰두하고 있어, 정신적 성숙을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많은 사람들은 절망의 감정을 깨달은 이후 삶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이 중 다수는 정신적 성숙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다시 쾌락으로 퇴행한다. 그러나 속세로의 퇴행이 절망을 잊는 방법이 아님을 느끼게 된 뒤에 결국 자기 자신의 본성(자유의지)을 고쳐야만 절망의 근원을 뿌리 뽑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신적 성숙을 이루게 된다.

 

정신적 성숙은 다름 아닌 신 앞에 단독으로 서는 것이다. 신 앞에 선 나는 신의 관념을 가지고 신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로 거듭나면서 절망에서 해방된다. 유한하고 파편적인 앎에 그쳤던 인간에서 무한하며 전지적인 신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절망에 대한 무지->절망에 대한 인식->속세로의 퇴행->속세에서의 해방이란 4단계를 통해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개인은 주체성, 결단력을 발휘해 타인, 자신을 버림으로써 신에게로 한발자국씩 나아간다. 이 과정은 교회, 교리가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아가는 과정이며, 지금여기서 벌어지는 과정이다.

 

보다시피 그의 철학은 기독교의 세계관에 많이 치우쳐져 있으나 현존주의(실존주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물음이 남는다. 유한한 인간이 반드시 무한한 세계로 나아가야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 어쩌면 유한한 삶을 긍정할 때 우리의 삶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 아닐까? 두 번째로는 그의 구원에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남과 나 사이에 대한 생각 없이, 자신과 신의 관계가 진일보한다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다. 나는 타자와 아무 상관없이 나 자신의 결단력으로 신에게 구원받는 것인가? 공동체와 정의에 대한 고려는 지극히 속세에 관한 일이고 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가?

 

마지막으로는 신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이다. 자유의지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타인을 버리고 자유의지라는 사다리를 버림으로써 자신마저 버리라는 그의 구원론은 도덕의 근원을 신에게로 돌린다. 타인을 아껴서가 아니라, 신을 아끼기에 타인에게 선행을 실천하는 도덕을 지키는 인간의 탄생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선한 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이야기다. 신이 선하다를 보장할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신의 속성을 인간이 함부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인가? 외려 부정신학의 방향이 옳았던 것이 아닐까? 그 외에도 왜 신이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가? 이승우의 캉탕과 같이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책은 한국 사회만 특별하게 따로 생각할 부분은 없다고 판단한다. 책 내용은 인류 보편사에 적용되는 질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책 내용에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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