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은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이메일을 쓰고 있었다.
헤어진지 꼬박 10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헤어지자고 말 한 사람은 자신이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
용서해 달라는 말,
단지 그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자존심이 강한 미영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굳은 맘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이다.
이메일 주소 창에 남자친구의 주소를 입력한 후,
그녀는 어떤 내용을 써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과를 하는 게 좋을까? 아냐, 내가 왜 사과를 해. 용서해 준다고 하는 게 좋겠지? 아냐, 이건 너
무 호소력이 없어. 음. 음....’
고민에 빠진 미영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생머리의 일부를 연신 손으로 꼬고 있었다.
무작정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만이었으나,
이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이건 아냐.......이것도 아냐.....아 이것도....”
계속해서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하던 미영에게 순간,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다 그 자식이 잘못한 거잖아. 지금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를 판에 감히 다른 여자를 만나?’
그 순간,
[죽어]
미영은 무의식적으로 ‘죽어’라는 글자를 치고 있었다.
“어? 이러면 안 되지. 깜짝이야...”
의도하지 않게 손이 움직인 터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백스페이스를 연타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동안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러던 중,
미영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자신의 양 손으로 양 뺨을 한 번 철썩 때린다.
“그래! 유미영! 오늘 딱 한 번만 자존심 버리자. 정말 내 생애 마지막이다. 알았지 미영아!”
미영은 무조건 굽히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미영은 거침 없이 타자를 쳐 내려갔다.
보기 민망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아.직.도.널.사.랑.....그런데 이 나쁜 새끼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망할 새끼...”
한창 글을 쓰다가 또 다시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
깜짝 놀라 또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미영.
미영은 그렇게 울컥하는 마음을 여러 번 가라앉히며,
다양한 애정표현으로 범벅 된 이메일을 가까스로 완성해간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 돌아오면 진짜 나쁜 새끼다.’
A4용지로 5장은 거뜬할 길이의 장문이었다.
문장의 끝마다 갖가지 이모티콘이 들어 있었는데,
특히 하트가 가장 많았다.
그녀는 마우스 휠로 스크롤을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며 자신의 글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음... 보고 싶은 형석이에게. 아 아냐. 투 형석. 아 이것도 아냐. 음음...”
마지막으로 제목만 적으면 메일은 완성이었다.
이것도 미영에게는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여러 문구를 놓고 걱정하던 미영은 결국,
‘사랑하는 형석에게’로 타협을 보고 제목을 입력했다.
문장 양 옆으로 하트를 두 개씩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영은 한 번 더 글을 확인해볼까 했지만,
왠지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두려워,
눈 딱 감고 ‘메일 보내기’를 클릭했다.
[발송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남자친구가 읽는 일만 남았다.
미영은 어쩌면 남자친구가 벌써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일이 오면 핸드폰으로 문자가 오게끔 설정할 정도로,
꼼꼼하게 메일을 체크하는 남자친구의 버릇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보낸메일함’을 클릭하고 방금 보낸 메일을 열었다.
다시 봐도 정성이 느껴지는 이메일이라고 생각하며 첫 줄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용서해줘 제발(づ_T) 난 너 없이는 못 사는 거 알잖니(づ_T)]
[너와 헤어지고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ㅠ.ㅠ)]
[사랑한다구~♡ 너도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지?(~.^)]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미치겠네...”
쓸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온통 낯 뜨거운 말 뿐이었다.
미영은 후회하지 말자고 되뇌이며 꾹 참고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미영이 갑자기 한 문장에서 멈칫한다.
[나는 아직도 널 사랑해♡ 죽어. 너도 아직 날 사랑하잖아 그렇지?(*^^)/]
“어? 이거 뭐야 언제 이런 말이 들어간 거야!”
미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죽어’라는 말을 문장에 섞어 버린 것이다.
‘메일을 취소해야 돼... 제발 읽지 않았기를... 제발...’
부랴부랴 수신 확인을 클릭하는 미영.
[ 받은날짜 : 2008. 8. 18 (20:47) ]
한 발 늦었다.
이미 남자친구는 미영의 메일을 연 것이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내가 대체 그 말을 왜 쓴 걸까. 혹시 아까 조금 나쁜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때 무의식적으로 쓴 건가?
미치겠네 정말!’
단어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영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가 다른 문장들을 보면서,
이런 오타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미영은 애꿎은 입술만 계속 이빨로 깨물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마우스 왼 쪽 버튼을 연신 두드리고 있다.
남자친구의 답장을 바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받은메일함’을 계속 해서 클릭하는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지치지 않고 클릭하던 미영의 손가락이 멈췄다.
드디어 남자친구의 답장이 온 것이다.
[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21:10:43) 2.1k ]
보낸 제목 그대로 답장을 보내왔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적은 용량.
대체 몇 마디나 적혀 있는 걸까.
미영은 긴장 되는 마음에 쉽사리 답장을 클릭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분명히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쓰여 있을 거야.’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클릭한다.
-딸칵
[보낸이: “김형석” (hyungsuk80)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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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간결했다.
‘죽어’.
그는 미영이 실수로 쓴 그 단어 하나만 사용해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미영은 슬픔과 충격에 휩싸여 한 동안 그 간결한 메일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고작 이런 답장을 받으려고 난, 이렇게 고생해서 메일을 썼단 말인가.
나쁜 새끼. 정말 나쁜 새끼.’
한 편으로는,
꼼꼼한 남자친구의 성격상 그런 실수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는데도,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메일을 보낸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답장 덕분에,
더 이상 남자친구에게 미련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 미영이었다.
‘그래 이제 나 혼자 가슴앓이 하지 말고 깨끗이 포기하자. 형석이는 더 이상 나한테 마음이 없는 게 분명
해.’
열 받지만 한 편으로는 고마운 메일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 동안,
‘죽어’라는 한 단어가 전부인 메일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미영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뒤늦게 잠이든 탓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적어도 7시에 일어나야 준비를 하고 9시까지 출근을 할 수 있었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밤 새 울기라도 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정신없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간다.
가벼운 세수와 가글로 초고속 세면을 마치고,
부스스한 머리를 빗질만으로 진정시킨 채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잊은 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던 미영은 문득 켜져 있는 컴퓨터를 발견한다.
“어? 내가 어제 컴퓨터를 켜 놓고 잤던가?”
슬쩍 마우스를 움직여보니,
까만 대기화면이 원래대로 전환된다.
‘죽어’라고 적혀있는 남자친구의 답장도 그대로 열어 놓은 상태였다.
“어 이상하네. 어제 분명히 컴퓨터를 끈 기억이 나는데.”
미영은 늦었지만,
이왕 컴퓨터가 켜진 김에 받은 메일이 혹시 있나 들어가 보았다.
“어? 형석이?”
남자친구에게서 두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04:29:27) 2.1k ]
[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06:11:52) 2.1k ]
제목은 어제와 똑같았다.
그리고 내용은,
-딸칵
[죽어]
-딸칵
[죽어]
똑같았다.
출근길.
미영은 만원 버스 안에서 용케 자리에 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미영은 그 어느 날보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두통의 원인은 단연코 남자친구였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런 오타는 왜 써 가지고.’
자책에 이어지는 가슴앓이.
‘그래도 그 나쁜 새끼. 차라리 무시를 하던가. 똑같은 메일을 세 번이나 보내서 나를 엿 먹여? 나쁜 새끼.’
그리고 이어지는 원망.
이미 30분은 지각 해 버린 출근길이라 미영의 마음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거기다 오늘 조회는 악독하기로 소문난 악녀 양과장이 맡는 날이 아닌가.
미영에게는 정말 최악의 아침이었다.
버스는 세종 사거리를 지나,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마치 팝콘이 터지듯 버스에서 사람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미영 또한 밀려나오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미영이 사람들을 밀치며 달리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회사 엘리베이터 앞까지 2분 만에 도착했다.
물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볼썽사납게 헥헥 거리긴 했지만.
“어, 미영씨. 어디 급한 일 있나 봐?”
귀에 익은 목소리.
미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한다.
비싸 보이는 고급 정장, 살짝 배가 나왔지만 위엄 있는 풍채.
“아, 아!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는 미영이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가를 찌푸린 걸로 보아 결코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래, 혹시 지금 출근 한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런 거면...적어도 40분은 늦은 건데 말이
야, 그렇지?”
사장이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얘기한다.
딱 봐도 억 소리가 날만한 고급시계였다.
“아, 저기, 그게, 음.”
미영이 몇 번 입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떨 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땡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미영이 살짝 고개를 들어, 사장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다.
“저, 사장님 엘리베이터 왔는데요...”
미영을 빤히 쳐다보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사장이 ‘쯧’하고 혀를 한 번 찬다.
“아, 나는 1층에 볼 일이 좀 있어. 그리고 양과장한테 이따 오후에 잠깐 내 방에 들르라고 하세요. 참나
사원관리를 이 모양으로 하나.”
“예.. 알겠습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미영.
힘없는 손으로 9층 버튼을 누르고, 모서리에 기댄 채 핸드폰을 꺼낸다.
그리고 액정을 보는 순간 미영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읽지 않은 문자 53개가 있습니다.]
53개.
미영이 하루 평균 받는 문자양은 50개는 커녕 30개도 될까 말까였다.
그런데 잠깐 오전 사이에 받은 이 엄청난 문자의 개수는 무엇이란 말인가.
평소 같았으면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했겠지만,
오늘은 불안함이 앞섰다.
미영이 그런 마음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
“응? 이게 뭐야.”
미영이 관리하는 미니홈피의 메시지 알림 도우미 문자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미영이 확인버튼을 계속해서 눌렀다.
[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
[ (싸이월드) 쪽지(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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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
미영은 엘리베이터가 열린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문자 메시지에 몰입하고 있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적어도 지금 확인 중인 34번째 까지는 그랬다.
“유미영씨!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정신없이 문자를 확인하는 미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열려진 엘리베이터 문 앞에 팔짱을 끼고 표독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양과장이 보였다.
점심시간.
미영은 오전 내내 양과장의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한 쪽 손에는 300원짜리 싸구려 종이컵 커피가 들려 있었다.
미영은 아침에 확인한 메시지의 정체가 궁금했다.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
점심시간에 확인해 보니 32개가 더 와 있었다.
익숙한 윈도우 로그인 화면에 엔터를 누르고, 곧 장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클릭한다.
그리고 주소창에 자신의 미니홈피 주소를 입력한 후 팝업 창이 뜨길 기다린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종이컵 끝 부분을 연신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화면이 출력 되자, 미영이 '받은 쪽지 함'을 클릭한다.
-딸칵
[이름 내용 날짜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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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안 읽은 쪽지는 8페이지에 달했고, 한 페이지 당 10개의 쪽지가 있었다.
미영은 굳이 내용을 클릭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멍 한 모습으로 다음 페이지를 클릭했다.
-딸칵
[이름 내용 날짜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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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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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지만 잠시 흠칫하던 미영이 이번엔 마지막 페이지를 클릭했다.
-딸칵
[이름 내용 날짜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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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황지연 7,8월 클럽음악 추천 당첨자 08.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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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그저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가 궁금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남자친구에 대한 정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극도의 불쾌함, 그리고 모멸감.
어느새 얼굴까지 시뻘게진 미영이 자신의 핸드폰 슬라이드를 거칠게 밀어 올렸다.
그리고 1번 버튼을 길게 누른다.
[연결 중 : 우리여보♥]
아직도 단축키 1번에 저장 되어 있는 남자친구의 번호였다.
-뚜우.... 뚜우.... 뚜우....
언제나 연결 음이 세 번 이상 넘기 전에 받던 남자친구였다. 그런데,
-뚜우.... 뚜우.... 뚜우.... 뚜우... 고객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잠시 후 소리샘에 연결됩니다.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두 번을, 세 번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미영이 힐끗 시계를 확인해 본다.
12시 58분.
점심시간이 2분 남았다.
시간을 확인한 미영이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한다.
클릭한 곳은 쪽지의 ‘답장쓰기’였다.
[보낸이 : 유미영 받는이 : 김형석
이 나쁜 새끼야. 내가 실수 하나 했다고 그
렇게 꼬투리를 잡니? 이제 진짜 끝이야. 다
신 너한테 연락 안 할 거니까, 너도 이제 이
딴 유치한 짓 그만해. 평생 얼굴 볼 일 없었
으면 좋겠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보내기 │ 취소 ]
글은 1분도 안 돼 썼지만, '보내기'를 클릭하지 못 하는 미영이었다.
지우고 좋은 말로 다시 쓸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곧 있으면 양과장이 들어올 것이고, 이런 사소한 걸로 또 꼬투리를 잡을 게 뻔했다.
‘나쁜 새끼. 이제 끝이다 김형석. 잘 살아라!’
눈을 질끈 감은 미영이 오른 손 검지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딸칵
[쪽지가 발송 되었습니다.]
‘이걸로 끝이야. 그 놈도 생각이 있으면 더 이상은 나한테 그러지 못 하겠지.’
그리고 미영은 울기 시작했다.
퇴근시간.
미영이 부리나케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
간단히 책상을 정리하고,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
“미영씨. 잠깐.”
양과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되도록이면 퉁퉁 부운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살짝만 고개를 돌려 양과장을 쳐다보았다.
“..네?”
“잠깐 나 좀 보고 가.”
자리에 앉은 채 두툼한 서류 뭉치를 책상에 두 번 탁탁 두드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양과장.
미영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
“미영씨 요즘 왜 그래?”
“아.. 죄송해요. 제가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늘 뿐이 아니잖아. 요 근래 계속 업무 상태도 안 좋고, 무기력하고, 대체 왜 그러냐고.”
“저기 ... 그건... ”
“소문 들어보니까,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뭐 어쨌다는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이야?”
“아니.. 뭐 그것도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그게..”
“유미영씨!”
“네, 네?”
“당신 어린애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도 구분 못 해? 내가 당신 때문에 사장님한테 욕을 들어 먹어야
겠냐고!”
“아.. 저.. 죄송합니다.”
“아까는 왜 또 질질 짠 거야? 가뜩이나 요즘 분위기 안 좋은데, 자꾸 이런식으로 나올거야?”
“아..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미영씨, 자꾸 내 눈 밖에 나는데, 조심해. 미영씨 한 사람 짐 챙기게 하는 거, 식은 죽 먹기니까.”
“...... 예, 알겠습니다.”
......
집에 돌아오는 미영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예전 같으면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양과장 욕이라도 실컷 했으련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러기는커녕 남자친구 욕을 누군가에게 해야 할 판이었으니.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오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원망의 화살은 이내 자신에게 꽂히고 만다.
복잡한 마음은 표정으로 나타났고,
그런 미영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힐끗 쳐다보곤 했다.
미영에게는 그것조차도 스트레스였다.
......
미영의 상태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만원 버스 안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 표정이 미영과 비슷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시선에 시달리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 틈새에 꽉 끼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큰 스트레스였다.
거기에 의도적인지, 실수인지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미영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참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
-이번 역은 푸른지오 아파트 앞입니다. 다음 역은 당산역 삼선 아파트 앞입니다.
어느새 어둠이 자욱한 저녁 7시.
아파트 앞에서 분리수거에 한창인 경비아저씨와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고,
미영은 자신의 아파트 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중간 중간 아는 이웃들이 미영에게 인사를 해 오면,
미영은 그 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엘리베이터앞에 도달한 미영이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버튼을 누른다.
-땡, 끼이익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자신의 집이 있는 13층 쪽으로 엘리베이터를 움직인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미영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일단 목욕이 너무 하고 싶었다.
-땡, 끼이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와~ 1309호 언니다!! 언니 이제 집에 와?”
미영의 반 토막 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꼬마아이가,
미영을 보자마자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어. 지민이구나. 어디 놀러가니?”
미영 또한 이 아이가 1307호에 사는 9살짜리 꼬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미영을 1309호 언니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가끔씩 혼자 사는 미영의 집에 놀러와 컴퓨터 게임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응, 지민이 잠깐 4층에서 유리랑 놀기로 했어. 아 맞다. 근데 언니 있잖아~”
“응? 언니한테 할 말 있니?”
“응응. 오늘 언니네 집 문 앞에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어.”
지민의 말에 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티커? 전단지 말이니? 너희 집엔 없는데 우리 집만 잔뜩 붙여놨니?”
지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응. 내가 잘 보진 않았는데, 아무튼 되게 많았어!”
“그래 지민아. 내가 보고 혼내줘야겠구나.”
미영이 지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지민이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미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언니, 그럼 나 갈께. 빠이 빠이~.”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미영은 지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 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미영이 불현듯 두통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지민이 덕분인가? 나중에 초콜렛이라도 사줘야지. 후후’
미영의 집은 좌측 복도 끝에서 두 번째로, 복도 중앙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위치였다.
미영은 잠시 복도 중앙에서 자신의 집 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걸음을 다시 떼기 시작한다.
언뜻 봐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개수의 종이 쪼가리가 현관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진짜 오늘은 별 게 다 사람을 괴롭히네. 어떤 가게인진 모르겠지만 죽었다 너넨.’
가게 전단지 정도로 판단한 미영이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다가가면 갈수록 붙어 있는 종이가 일반 전단지와는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그것들이 손바닥 크기의 포스트잇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낀 미영이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
현관 앞에 도달한 미영이 잠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에서 나는 떨림이 미영의 흥분상태를 반증하고 있었다.
바로 문이 문제였다.
아니, 문 앞에 붙어있는 종이들이 문제였다.
[죽어]
분홍색 포스트잇 종이에는 단지 이 두 글자만이 투박한 손 글씨로 쓰여 있었다.
[죽어][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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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종이들이, 문손잡이 윗부분부터 미영의 머리가 닿을만한 곳까지 불규칙적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심지어는 초인종 버튼에 까지도.
개수는 적어도 200장 이상은 되어 보였다.
"......"
미영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내 극도의 흥분상태가 찾아온다.
“김형석, 이 개새끼!”
미영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거친 말을 내뱉는다.
-찌익 찌익
그리고는 거칠게 포스트잇 종이들을 때내기 시작했다.
개수는 많았지만 포스트잇의 손쉽게 뜯어지는 특성상 얼마 가지 않아 종이를 다 뜯어낼 수 있었다.
미영은 잠시 쭈그려 앉아 뜯어낸 종이들을 한 데 뭉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양이 많았는지 뭉친 덩어리의 크기가 거의 농구공만큼 컸다.
“나쁜 새끼.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이게 무슨 망신이야.”
종이 덩이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다급하게 현관 손잡이에 열쇠를 꼽는다.
-철컥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한 번 좌우를 살핀다.
그리고 복도에 자신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
문을 잠근 후, 미영은 잠시 문에 기댄 채 멍 하니 서 있었다.
도무지 형석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깝지도 않은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 굳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오타가 정말 사무치게 상처가 되기라도 한 걸까?
미영은 이제 형석의 행동에 무서움마저 느껴졌다.
“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거야!!”
소리를 지르며 종이 덩어리를 방 안으로 던지는 미영.
그리고는 거칠게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들어간다.
두통은 거의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씩씩 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미영이 식탁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의자를 빼, 앉는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아까처럼 1번 버튼을 꾹 누른다.
-고객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
“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을 던져 버리는 미영.
몹시 상기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그러면서 미영이 다가간 곳은 컴퓨터 앞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목욕도 지금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컴퓨터를 켜야 한다는 생각 뿐.
미영이 거칠게 전원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넘어가기도 전에 엔터 버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배경화면이 전송 되자, 미영은 자신의 메일로 접속을 시도했다.
[받은 메일함 : (8459)
유미영님, 메일 정리가 필요합니다.]
미영이 입술을 꽈악 깨물기 시작했다.
-딸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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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었다.
그렇지만 미영의 화가 머리끝까지 도달하는 데는 충분했다.
“김형석!!!!! 너 이 개새끼야!!!”
모니터에 대고 욕설을 내 뱉는 미영.
미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애꿎은 키보드만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미영의 눈에 익숙한 아이콘이 들어온다.
그리고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마우스로 그 아이콘을 더블 클릭한다.
[네이트 온 :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메신저 프로그램이었다.
미영은 혹시라도 모르는 기대감으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현재 대화 상대 목록
지윤희(한슘만 뙁이 꿔지롸 쉬죠우)
김영민([영민] 그래도 계속 가라)
박세진(객체지향선형대수)
김미례(‘커피’ 休)
이인애(킹빨라, 쩜뻥끼, 리보쌈, 우롹~)
이혜정(논문,, 논문..)
송성호(서울역에서 영화 촬영하는 강혜정 봤다!!)
김형석(고달픈 내 인생ㅡㅡ;)
양미정([미정] 파이팅!)
이기범(모든 것은 ‘있음’과 동시에 ‘없음’이다)
이류학(피카츄 전기세 내는 소리하고 있네)]
접속 되어 있는 친구 목록을 확인 하던 미영의 눈에 무언가가 확 꽂혔다.
......
[ 김형석 (고달픈 내 인생ㅡㅡ;)]
......
있었다.
미영의 남자친구 ‘형석’이 메신저에 접속해 있었다.
잠시 멈칫하던 미영이 남자친구의 대화명을 클릭한다.
-딸칵, 딸칵
[ 김형석(고달픈 내 인생ㅡㅡ;) 님과의 대화.]
대화창이 열리고, 미영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대화 중의 금전 거래, 개인정보 교환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김형석!!! 이 나쁜새끼야!! 너 그것밖에 안 돼? ]
타자를 친 후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떤 말이든 좋으니, 남자친구의 답신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대답이 없는 남자친구,
미영은 초조함에 다시 자판을 두들긴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야! 입 있으면, 아니 손 있으면 말 좀 해봐! 뭐야 너!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야 대답 하라고!! 내가 그렇게 우스워? ]
하지만 여전히 대답 없는 남자친구.
얼마간 시간을 더 보내던 미영이,
그만 포기하고 쪽지를 보내려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짚는 순간,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대화창 하단에서 남자친구가 메시지를 넣는다는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대화명도 바꾼 채로였다.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미영으로선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역시나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게 더욱 더 미영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너 나한테 왜 이러니 정말. 내가 메일 보낸 게 그렇게 거슬렸니?
그런 거면 내가 사과할게. 이제 그만하자. 이런 유치한 장난도 그만하고 싶고,
너랑도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우리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 이제 그만해줘 제발.]
최소한 자신의 메시지는 보고 있다는 확신으로 긴 글을 입력한다.
이정도로 했으면 이제 인격적으로 나와야 정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대답은 한결같기만 하다.
[김형석(죽어) 님의 말 :
죽어 ]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왜 자꾸 죽어, 죽어 이딴 말만 하는 거야!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야 이 개새끼야!!]
미영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보니, 남자친구는 이 상황을 일부러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짓궂게 대할 리가 없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너, 그나마 옛정을 생각해서 참는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라.]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
미영의 협박에도 남자친구는 여전했다.
더 이상, 미영의 눈에 남자친구는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연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이상자에 불과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 미친놈. 어디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말을 끝으로 미영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아까 던졌던 핸드폰을 집어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뚜우우... 뚜우우... 딸칵, 예 112입니다.
전화를 건 곳은 112였다.
미영 나름대로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방법이었다.
수화기 너머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정신병자가 계속 저를 협박해요. 도와주세요!”
-지금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닌데요, 주로 인터넷을 통해 당하고 있어요.”
-아, 그러시면 제가 사이버수사대 팀으로 연결을 해 드릴게요. 끊지 말고 기다리세요.
“예...”
딸칵 소리와 함께 잠시 기다려 달라는 안내멘트와 음악이 나온다.
기다리는 동안 미영은 다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어느새 남자친구가 도배한, 그 지긋지긋한 ‘죽어’라는 말만 눈에 들어온다.
미영의 표정에서 남자친구를 향한 연민은 이제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을만큼 싸늘했다.
-예 사이버수사대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신고 좀 하려고요.”
-예, 무슨 종류인가요?
“예?”
-아, 뭐 해킹이나, 사기, 협박, 개인정보 등등 이런 종류요.
“아아. 음, 협박이에요. 이메일과 미니홈피 쪽지 등으로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해서 보내옵니다.”
-어떤 말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죽어’ 라는 말, 단 두 글자만 계속 보내고 있어요.”
-언제부터 그랬죠?
“어제 밤 부터였어요. 저 정말 이것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정말 죽겠어요.”
-신속한 처리를 위해서, 받으신 이메일과 쪽지를 캡처해서 이쪽으로 보내주시겠습니까?
“예? 아 예, 그렇게 할게요. 어디로 보내면 되나요?”
-바로 문자메시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메일 받으면 10분 내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예.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미영이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엔 약간 실소까지 머금은 상태였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신고했다. 분명히 내가 경고했었지? 이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가 초래한 거야.]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
변함없는 대답.
그 때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syberXX@112.com
지금 넣어주세요. ]
이메일 주소였다.
미영은 일단 대화창을 최소화 시키고 아까 들었던 캡쳐 작업을 시작했다.
메일 개수, 똑같은 제목과 똑같은 내용, 그리고 미니홈피의 쪽지 등,
최대한 자신이 당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캡쳐한 사진만 수 십장에 달했다.
익숙한 솜씨로 파일을 압축하고 ‘메일쓰기’를 클릭한다.
[발송이 완료되었습니다.]
“후우....”
신고를 마무리한 미영이 작은 한숨을 쉰다.
마음이 편해진 건지,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해진 건지 모를 그런 한숨이었다.
최소화 한 대화창에서는 계속해서 주황색 불 빛이 깜빡 거리고 있었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10분 내로 전화가 온댔지. 그래. 그 때까지 맘껏 지껄여봐라.”
미영이 대화창을 다시 원 상태로 돌렸다.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김형석 (죽어) 님의 말 :
죽어]
그저 죽으란 말 뿐.
살면서 이렇게 죽으란 말을 많이 들은 적이 있던가.
더군다나 흔히 친구들끼리 장난하는
‘너 죽어~’라는 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가뜩이나 혼자 사는 미영에게 조금씩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10분이면 된다.
늦어도 10분 이내에는 무언가 방도가 생길 것이다.
마냥 기다리기 뭐 했던지 미영이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다시 전화를 한다.
익숙한 컬러링이 들려온다.
“어? 여보세요? 나래야, 나야.”
-어? 유미영? 지지배가 전화 되게 오랜만에 하네.
중학교 때부터 만난 친구 ‘나래’였다.
그리고 미영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어.. 사실 너한텐 좀 미안한 일도 있고, 최근에 힘들기도 했고 좀 그랬잖아.”
-뭐.. 그랬지. 그런데 너 알고는 있는 거야?
“응? 뭘 말이야?”
-뭐냐니. 형석이 말이야 형석이.
“미안한테 그 새끼 이름은 꺼내지 말아줘. 하루 종일 얼마나 시달렸는지... 이제 치가 떨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달리다니?
“내가 메일을 보냈는데, 글자 하나 틀렸다고 그걸 꼬투리 잡아서 날 얼마나 괴롭히는지. 지금도 네이트에
서 계속 그러고 있다. 이런 앤지 몰랐어. 끔직해 정말.”
-지금 네이트에 형석이가 있어?
“어. 내가 대화 저장해서 보내줄까? 너도 이런 애랑 빨리 모르고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야.”
-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응? 뭘 자꾸 모르냐는 거야?”
잠시 정적이 흐른다.
몇 초 동안 나래로부터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나래야?”
-응... 잘 들어.
“어? 무슨 일이야 뜸 들이지 말고 말 해.”
-형석이 죽었어.
순간 미영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뭔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하, 하하하. 이 년이 갑자기 왜 장난을 치고 그래. 형석이 지금 네이트에서 나랑 대화중이라니까.”
-장난을 치는 건 너 아니야? 형석이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아니?
나래의 음성에 장난 끼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진지한 모습은 처음일 정도였다.
“야.. 너 왜 그래. 정말 나랑 대화중이라니까. 의심나면 접속해 봐.”
-됐어. 다른 사람인가보지. 너랑 헤어지고 형석이 자살했어. 한강에서 뛰어 내렸다고.
미영의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어, 언제? 대, 대체 언제?”
-너랑 헤어진 바로 다음날.
“아아아아악! 거짓말 하지마!!!!!”
미영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핸드폰을 던져 버린다.
벽에 부딪힌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미영은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형석이가 죽었다니.
대체 그럼 누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떨리는 온 몸을 부여잡고 미영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너... 너... 누구야!! 너 형석이 아니지!?]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너 누구냐고!! 너 어디야 대체. 어디서 이런 장난을 하고 있는 거야!!]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미영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휘젓는다.
바로 그 때,
-드르르르. 드르르르.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멈칫 하던 미영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냅다 몸을 던진다.
“여, 여보세요? 사이버 수사대에요?”
미영이 의지할 곳은 이제 이곳 밖에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미영이 전화를 받는다.
-예, 맞습니다. 보내신 파일 확인 했고요. 아이피 추적도 완료 했습니다.
“예예. 어떻게 됐나요?”
-죄송한데요. 지금 그 쪽 주소가 영등포구 당산동 푸른지오 아파트 208동 1309호가 맞나요?
“예예. 맞아요 맞아요.”
-정말 맞아요?
“예, 맞다니까요!”
-이런 큰일이네. 어서 집을 나오세요!
갑자기 상대편이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예? 무슨... 말?”
-아이피 추적한 결과, 주소가 당신 집으로 나왔어요! 어서 나와요!
“.... 예!?”
-그 자식이 지금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미영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남자친구는 죽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힌 사람은 남자친구를 사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영이 다급하게 집안 곳곳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심장은 한없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러던 중,
미영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춘다.
그 곳은 베란다였다.
경악에 찬 미영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닫힌 베란다 창문으로, 낯선 검은색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똑,똑,똑
.......
-유미영씨! 어서 밖으로 나가요!
......
아주 약간,
베란다 문 틈새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약간의 틈새로 검은색 야구모자가 보인다.
미영은 이미 사고가 정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 당장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조차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 했다.
“후우욱, 훅, 후욱”
불규칙한 호흡.
그리고 흘러내리는 식은 땀.
두 눈에는 언제 흘러도 이상할 게 없는 방울들이 맺혀있다.
그리고,
-터억!
갈려진 문 틈 사이로 하얀 장갑에 덮인 손이 하나 걸쳐진다.
-끼이이이
미영을 희롱하기라도 하듯, 느린 속도로 문이 열려진다.
그리고 보이기 시작한다.
검은 점퍼, 검은 바지, 그리고 하얀 마스크.
미영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끼익, 덜컥!
문이 모두 열렸다.
미영의 시선이 괴한의 오른 손에 들려진 팔뚝 길이만한 칼에 박힌다.
“아, 아, 아아, 아아아... 꺄아아아악!!!”
비로써 사고가 회복된 미영.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베란다에 서 있는 온통 시커먼 차림의 괴한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찰나의 순간,
미영의 머릿속이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미영이 현관 쪽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은 미영이 창고로 쓰는 작은 방이었다.
괴한과 미영의 거리 차이는 불과 6걸음 남짓인데,
이중으로 잠가놓은 현관을 열고 나가기는 시간이 촉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현관을 향해 뛰던 미영이 급하게 몸을 틀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괴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미영이 다급하게 손잡이를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미영의 세 걸음 앞으로 다가온 괴한이 칼을 든 오른손을 치켜들기 시작한다.
“꺄아악!! 꺄아악!!!”
-쿠웅!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어젖히는 미영.
황급히 몸을 집어넣고 문을 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덜컥!
문이 다 닫히지 않는다.
살짝 문을 떼고 다시 한 번 문을 미는 미영.
-덜컥!
하지만 또 다시 문은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미영은 공포감에 동그라진 눈으로 문틈을 쳐다보았다.
-덜컥덜컥, 덜컥덜컥
칼이었다.
괴한이 문틈으로 칼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미영은 이제 서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고된 눈물이 왈칵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큭큭큭큭, 이 년아. 그러게 신고는 뭐 하러 했니. 안 그랬으면 조금 더 살 수도 있었잖아. 멍청한 년.”
문 밖에서 괴한의 소리가 들려온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였지만 젊은 남자의 톤이었다.
“누, 누구세요! 대,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
미영이 말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창고로 쓰고 있으니 분명히 무언가 집을 만한 게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누구냐고? 누군지 알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서? 큭큭.”
조금씩 미는 힘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미영은 다급했다.
최대한 몸을 기울여 문을 닫고는 있지만 이대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어떻게든 문틈으로 찔러 넣은 칼을 빼고 문을 잠가야만했다.
-콰앙!
괴한이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문 쪽에 몸을 붙이고 있던 미영의 몸이 순간 팍 하고 튕긴다.
다행히 붙잡은 손잡이는 놓치지 않았지만 몇 번 반복이 되면 견딜 수 없을 게 뻔했다.
-콰앙! 콰앙!
“아악! 그만해요! 형석이, 형석이 때문인가요? 형석이가 자살해서?”
울부짖듯 외치는 미영의 말이 끝나자, 괴한의 발길질도 덩달아 멈췄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미영으로선 한 숨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니까짓 년 때문에 형석이가 죽었다는 게 제일 열 받는다. 한번만 더 그 아가리에서 형석이 이름이 나오
면..."
괴한이 잠깐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말을 잇는다.
“씨발, 어떻게 죽여야 될지 모르겠네. 쉽게 죽진 못 할 거야 이것만 알아둬라.”
미영은 정신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안 쓰는 식기 세트, 덩치 큰 가구 및 선반과, 액자 등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각선으로 오른 쪽 구석에는 쇠 봉 같이 무기가 될 만한 것들도 보였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문에서 몸을 떼야만 했다.
결국,
쓸 만한 물건들이 있어도, 미영이 문에 몸을 붙인 채 잡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손에 닿는 물건들은 미덥지 못한 물건들임에 분명했다.
-콰앙!
괴한이 다시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강한 힘이었는지 미영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영이 급한대로 손을 뻗고 무언가를 잡았다.
손의 감촉으로 봐서는 무언가의 손잡이.
미영이 재빨리 그곳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작은 선반의 손잡이였다.
미영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생각났다.
이 안에는,
-벌컥!
“있다! 있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낸 미영, 문 밖에서 조소가 들려온다.
“큭큭크큭, 미친년. 아직 여유가 있나보지?”
선반 안에는 놀랍게도 각 종 향신료와 양념들이 각 종류마다 작은 통에 들어있었다.
미영은 퍼뜩 떠오르는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손을 뻗어 그 중 두 개를 빼낸다.
그것들은 바로 고춧가루와, 후추였다.
-콰앙!
“아아악!!”
허리 쪽에 강렬한 충격을 느끼는 미영,
정말로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다.
미영은 다급하게 후추통과 고춧가루 통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 손에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부어 한 손이 꽉 차게 움켜쥐었다.
손에 쥔 이 가루들이 미영에겐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어떻게든 생각을 추슬러야 했다.
-콰앙!!
“크크크큭, 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니?”
-콰앙!!
“너한테 그 좆같은 메일 하나 받고 바로 출발했단다. 쳐 자고 있을 때 배때지를 쑤셔 버릴까 하다가 그렇
게 쉽게 죽으면 우리 형석이만 억울한 것 같아서 말이지.”
-콰앙!!
“형석이 메일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크크큭, 유서에 다 써져 있더라고.”
-콰앙!!!
“유서에다 뭐 그딴 걸 썼냐고? 유서가 거의 20장은 되더라. 그런데 씨팔 네 년 얘기만 열 장이 넘어. 가족
들한테는 미안하니 어쩐다니 시시껄렁한 몇 줄 적어놓고, 네 년 보고 싶다는 얘기만 주절 주절이더라
고.”
-콰앙!!
“야마가 돌겠니, 안돌겠니? 뭐, 맞아. 내 동생이 쪼다지. 등신새끼가 여자 하나 때문에 자살을 쳐 하고.
씨발 뭐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죽은 동생 바지 주머니에 집 열쇠가 하나 있더라. 거기에 분홍색 포스트
잇이 붙어 있었는데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아냐?”
-콰앙!!
“형, 이거 미영이한테 꼭 돌려줘, 라고 쓰여 있더라. 씨발.”
미영은 몇 번이나 문에서 튕겨나갈 위기를 맞았지만, 간신히 손잡이를 붙잡아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잠자코 듣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저기요. 대충 누군지 짐작이 돼서 그러는데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발길질이 멈췄다.
“크크크큭, 용서? 너가 바라는 용서가 뭔데? 사는 거? 아니면 편하게 죽는 거? 후자라면 들어줄 수도 있
다. 단, 지금 문을 열면!”
미영이 굳은 표정으로 이빨을 한 번 꽉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연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더 이상은 무섭고, 힘들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차라리 문을 열게요.”
미영이 왼 손에 점점 힘을 주면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도 뗀 다음,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벌컥!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시커먼 괴한이 칼을 든 채로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인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매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로 보아,
마스크에 가려져 있지만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영은 움켜쥔 왼손을 살그머니 허리 뒤쪽으로 숨겼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미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괴한이 말을 꺼낸다.
“씨팔, 이딴 년이 뭐가 좋다고... 마음이 바뀌었어. 너 그냥 산 채로 찢어 죽일래.”
말을 내뱉은 괴한이 한걸음을 성큼 내딛어 문틀을 밟았다.
미영에겐 이제 더 이상의 시간이 없었다.
“저, 저, 저, 어, 얼굴 한 번만 보, 보여주세요. 제, 제발 부탁이에요.”
절대적인 공포를 간신히 억누르고 미영이 말을 내 뱉었다.
하지만 미영에겐 좌절감만이 가득했다.
상대방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밖에 안 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괴한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크, 크큭 그래, 뭐 혹시, 내가 형석이는 아닐까, 뭐 그런 마음으로 한 말인가 보군. 죽기 전에 한 번
보여주마 내 얼굴, 크큭”
괴한이 한 쪽 손을 귓가로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걸쳐 있는 마스크 끈을 빼냈다.
-쓰윽,
마스크가 한 쪽으로 쏠리면서 드디어 얼굴이 드러난다.
물론 형석이가 아니었고, 미영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미영에겐 놓칠수 없는 기회가 찾아온 것은 확실했다.
“고맙다. 이 미친새끼야!!”
소리를 내 지르며,
숨기고 있던 왼손을 들어 온 힘을 다해 괴한의 얼굴로 휘둘렀다.
-퍼억!
순식간에 괴한의 얼굴이 고춧가루와 후추로 범벅이 된다.
한 손 가득이 움켜쥐었던 터라 양또한 적지 않았다.
“끄아아악!! 푸, 푸엣취!!”
고춧가루와 후추의 효과는 미영의 기대 이상이었다.
마치 최루탄에 맞은 것처럼 괴한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 순간,
미영으로선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였다.
당장 쇠 봉을 들고 괴한을 물리칠지,
아니면 문을 닫고 잠가버릴지.
“아아아악! 이 미친년!! 씨발. 씨발!!!!!”
미영이 선택이 후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왜냐하면 괴한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칼을 허공에 휘둘러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콰앙!!, 철컥
문을 닫았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하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손잡이 중앙을 꾹 눌러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등진 채 주저 않는 미영.
“흐..흑, 흐흑... 흐흑흑...”
그리고 하염없는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열어!!!!! 씨팔 열어!!!!”
-콰앙!!
“열라고!!!!”
-콰앙!!
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괴한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몰라 수납장을 문에 끌어다 놓고는
한 손으로 쇠 봉을 꼭 쥐고 있는 미영.
흐르는 눈물을 나머지 손으로 연신 닦아 내느라 바쁘다.
-쾅! 쾅! 쨍그랑!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문을 여는 것은 포기한 모양이었다.
대신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부셔 놓을 생각인 것 같았다.
“죽어! 죽어! 죽어!! 씨팔!”
깨지는 소리, 부셔지는 소리, 찌그러지는 소리,
그리고 고함 소리 등이 섞여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미영은 그저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떠는 수밖에 없었다.
악몽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콰앙!!
갑자기 문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괴한이 문을 발로 찬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미영이 몸을 더욱더 움츠린다.
“...내일 보자.”
아까까지와 다르게 차분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영은 오히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철컥, 끼이익
곧 있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괴한이 집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끼이익 쾅!
문이 닫혔다.
그리고 방금까지의 소음들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사방이 고요하다.
“......”
한동안 적막이 흐르고, 미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다 입도 뻥긋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괴한이 바로 앞에 서 있는 건 아닐까.
밖에 나간 척 하면서 또 다시 베란다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째깍, 째깍
적막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
-끼이이익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적막을 깨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 돌아왔나?’
미영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잡고 있던 쇠 봉도 다시금 힘을 주어 잡는다.
-저...
다른 소리.
한 글자뿐이었지만 분명히 그 괴한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미영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문에 귀를 붙인다.
“유미영씨! 유미영씨 계신가요? 계시면 나와 보세요!”
순간 미영의 눈에서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유미영씨 안 계신가요? 그 놈이라면 잡았습니다. 유미영씨!!”
“지엿. 역히 익...써효.”
미영은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 하고 싶었는데,
어찌나 목이 메는지 이상한 말이 나온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아 계셨군요. 그 놈 잡았습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미영은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아직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 누구신가요?”
“예? 아, 제가 누군지도 말을 안 했네요. 경찰입니다.”
-끼이이익, 저벅 저벅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 밖으로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 쪽에 누군가 또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 경장님 오셨어요? 그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 말도 마. 정두식이는 팔에 칼 맞고, 이민섭이는 얼굴에 제대로 한 방 맞아서 쌍코피 터지고...”
“아 그래요? 두식이 팔 괜찮아요?”
“아니 뭐 그렇게 심하게 찔린 건 아닌데, 아무튼 위험한 놈이었어. 진땀 뺐네 아휴.”
미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문 밖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화로 미루어 보아 경찰이 맞는 것 같았다.
“저기요.”
문 손잡이를 잡고 미영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어, 예? 어 안에 계셔? 예, 예 말씀 하세요.”
나중에 온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약간 놀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 사람... 여기 없죠?”
“예, 예. 저희가 잘 체포했습니다. 지금쯤 서 앞에 도착했겠네요.”
말을 들은 미영이 비로소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철컥, 끼이이익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문 앞에서 정복을 입고 서 있는 두 명의 남자 경찰들이었다.
한 사람은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젊은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듬성듬성한 머리숱에 삼십 대 중반 정도의 사람으로 보였다.
그 다음으로 보인 것은 처참하게 변한 거실의 모습이었다.
온통 깨지고 부서진 물건들로 바닥은 어지러웠고,
형광등 또한 껌뻑 껌뻑 거리며 밝지 않은 빛을 내고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싱크대 옆으로,
냉장고의 문 이음쇠가 박살이 났는지 잘 닫히지 않은 채 기우뚱하게 열려 있었고,
나무로 된 식탁의 다리 하나가 부러져 한 쪽으로 주저앉은 모습이 보였다.
싱크대 위에 위치한 선반은 모두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미영이 모아놓은 접시나 컵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바닥 아래에 깨진 채로 널려있는 것들이 그것들인 모양이었다.
“아, 괜찮으세요? 김순경, 부축 좀 해 드려.”
김순경이라고 불린 젊은 사람이 미영에게 다가온다.
“아, 저는 괜찮....으음”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데 민망하게 다리가 풀려 버린다.
어쩔 수 없이 김순경의 어깨에 몸을 맡기는 미영.
“음. 이거 완전 난장판이라 어디 앉기도 힘들겠네요. 음... 아, 저기 방 쪽은 괜찮아 보이네요.”
김순경이 미영을 부축하며 미영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경장님. 저 방으로 가시죠.”
박경장이라고 불린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능숙한 솜씨로 미영을 침대에 앉히고 자신은 컴퓨터 앞 의자에 앉는 김순경.
그리고 뒤 따라온 박경장은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괜찮으시겠어요? 일단 경위서 작성을 위해서 서까지 가주셔야 합니다만, 지금 상태로는 조금 힘들 것 같
네요.”
김순경이 미영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 했다.
“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미영이 몹시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어떤...”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 집에서 나한테 보낼 수 있었죠? 메일 같은 것들 말이에요.”
김순경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경장을 쳐다보았다.
“아, 그건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박경장이 미영 쪽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음, 미영씨가 맨 처음 받았던 메일을 빼고는 모두가 여기서 보낸 겁니다.”
“대체... 어떻게 보낸 거죠? 노트북이라도 쓴 걸까요?”
“그건 아니에요. 여긴 무선 인터넷 신호도 안 잡힌다고 그러더라고요.”
“예? 그럼 어떻게...”
“미영씨 컴퓨터로 보낸 겁니다. 미영씨 잘 때, 이 집에 몰래 들어와서는 대담하게 자는 미영씨 옆에서 컴
퓨터를 두드린 거죠.”
그게 과연 대담한 걸까?
그는 어차피 미영을 죽이러 온 것이었다.
만약에 그 때 미영이 눈을 떴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게 뻔했다.
그러니, 대담한 것과 상관없이 단지 그 상황을 즐겼을 것이라고 미영은 생각했다.
메일을 보낸 후 괴한은 베란다로 몸을 숨긴 채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미영이 나간 다음 미영의 컴퓨터를 이용해서 메일과 쪽지 등을 보낸 것이다.
거기에 소름끼치는 포스트잇 장난도 곁들이고 말이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미영에게 또 다시 공포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표정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예”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피의자와 무슨 관계라도 있으신건지...해서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박경장.
“형석이, 그러니까 제 예전 남자친구의 형인 것 같아요.”
미영이 의외로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아... 이거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남자친구의 형이라는 사람이 대체 왜...”
“자살했거든요. 형석이.”
“아......”
박경장이 짧은 탄식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잠시 묵직한 공기와 침묵이 흐른다.
“어험, 험”
영문을 모른 채 눈치만 보던 김순경이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일으킨다.
박경장이 그런 김순경을 힐끗 쳐다보고는 미영을 향해 말을 꺼낸다.
“일단 여기서 쉬고 계시죠. 어차피 오늘 밤엔 그 놈이랑 한 바탕하느라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 필요할 때
저희가 데리러 오든지 하겠습니다.”
“아... 네...”
미영의 대답을 듣고 박경장이 고개를 몇 번 끄덕 거리고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김순경과 함께 문 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아 참, 이따가 현장 감식반 올 지도 모르니까요. 그 때 꼭 문 열어주셔야 합니다.”
“네, 그럴게요.”
그 대화를 끝으로 경찰들은 문 밖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미영은 그들이 다 나간 후에도 계속 문 쪽을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어찌 됐건 사건의 진모도 밝혀졌고 잘 해결도 됐건만,
미영의 마음 한 구석에는 무언가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자살 때문인가 생각해 보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이치에 안 맞는 것으로 인한 찝찝함이었다.
‘분명히 내가 나간 틈을 타서 컴퓨터를 이용했고, 내가 들어온 후에는 베란다에 숨어 있었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미영의 눈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미영의 머릿속에 점점 그 찝찝함의 정체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미영이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컴퓨터 앞으로 걸어간다.
머릿속에 박경장이 했던 말이 울리기 시작한다.
......
“여긴 무선 인터넷 신호도 안 잡힌다고 그러더라고요.”
“여긴 무선 인터넷 신호도 안 잡힌다고 그러더라고요.”
“여긴 무선 인터넷 신호도 안 잡힌다고 그러더라고요.”
......
-딸칵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미영은 떨리는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채,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다는 대화창의 글귀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괴롭고, 무서운 날이었다.
하루종일 '죽어'라는 말에 시달렸고, 재수없게 회사에서는 사장에게까지 혼이 났다.
거기다 남자친구의 자살 소식을 들었고, 그의 형이 복수를 하겠다며 자신을 습격하기도 했다.
너무 놀라서 이젠 어떤 일이 생겨도 놀랍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런 미영에게 또 한 번 두려움이 찾아오고 있었다.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초조하게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대화창에 글이 입력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메신저에 오류라도 난 건가?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분명했다.
분명히 괴한은 미영의 컴퓨터를 이용해서 괴 메일과 쪽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미영이 귀가했을 때는 베란다에 숨어 있었다.
무선신호가 안 잡히기 때문에 노트북이 있어도 베란다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미영이 메신저로 대화했던 사람은 괴한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게 된다.
공범인 다른 사람이거나,
아니면 남자친구인 ‘형석’ 본인이거나.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입력 중이라는 표시뿐이다.
미영은 애 써 메신저의 오류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뚫어지게 모니터를 쳐다보던 미영이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ㅇ머래댜ㅓ랴ㅐ뫵뢪도려몽랴ㅐ매ㅑ어래ㅓ쟈ㅐㄷ괘몬ㅇ]
알아듣지 못 할 말.
미영은 메신저의 오류라는 자신의 추리를 입증하기 위해 손이 가는 데로 타자를 입력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메러ㅑ더ㅑㅐㅓ먀ㅐㅓ랴ㅐ머랴ㅐㅓㅔㅁㅈㄷ개ㅑ데잼갸ㅗㅓ래ㅑ어론아]
또 한 번 입력했다.
확인사살이라고 할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미영은 ‘오류’로 확정 짓고 메신저를 끌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글을 입력하자마자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프로그램 종료’에 커서를 대고 끌 준비를 하는 미영이었다.
그 상태로 시간은 흐르고 미영의 오른 손 검지손가락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갈 때 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오류인줄 알았던 대화창에 글이 입력되었다.
미영의 몸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한다.
“어, 어... 어,, 어...대, 대체 뭐, 뭐야!!!”
심하게 더듬으며 소리를 지르는 미영.
더 이상 차분해지긴 무리였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너,,, 너,,, 대체 누구야!!]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메시지를 입력한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아까 전과 똑같은 대화였다.
미영의 물음과는 상관없이 남자친구는 그저 ‘죽어’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당신 누구냐고! 당신도 형석이 가족 중 한 명이야? 나한테 복수하려고?]
괴한의 정체가 남자친구의 형이었으니,
다른 가족들이라고 미영에게 앙심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미영은 그들 중 한 명이 이런 몹쓸 장난을 하는 것이라 결론 짓고 있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형석이가 저 때문에 자살했다고 생각하시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본심이 아니었어요.
헤어질 맘이 없었다고요. 이메일로 사과까지 했다고요.]
가족들 중 한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꽤나 공손한 말투였다.
하지만 역시,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대답은 동일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정말 죄송해요. 제발, 제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하세요.
제가 싹싹 빌게요. 예? 제발요.]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미영은 생각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작심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니,
오히려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제가 그 쪽으로 갈게요. 제가 보시는 앞에서 무릎 꿇고, 주시는 벌 달게 받겠습니다.]
여전히 똑같은 대답이겠거니 생각하며 미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위에 널 부러져 있는 핸드폰을 집는다.
다시 한 번 IP추적을 의뢰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같은 집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까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열려진 베란다 때문인지 미영에게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우
시각은 어느새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경찰들도 피곤할테지.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우 딸칵,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사이버 수사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기, 여보세요?
......
-여, 보, 세, 요. 장난 전화인가요?
......
-전화 끊습니다. 장난전화는 형사 고발 요인이 되니 주의하세요. 딸칵,
......
미영은 말이 없었다.
다만 하루 중 가장 크게 뜨지 않았나 싶은 눈으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너
네
집]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미영에게 ‘죽어’라는 말이 아닌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미영으로 하여금 극한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죽어.jpeg (1.5M)
형석님이 파일을 보내려고 합니다. (승낙)]
남자친구가 메신저로 파일을 보내왔다.
미영의 머릿속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마우스로 ‘승낙’을 클릭한다.
-딸칵
[죽어.jpeg (1.5M)
파일 전송을 완료했습니다. (보기)]
순식간에 다운로드를 완료하고 미영이 ‘보기’를 클릭한다.
-딸칵
연결 프로그램에 의해 사진이 송출된다.
사진치고는 용량이 크다 했더니 역시나 모니터 전체를 가득 채우는 크기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누군가의 방 안을 찍은 것이었다.
침대와 컴퓨터가 보인다.
컴퓨터 앞에는 어떤 여자가 일어선 채로 마우스를 잡고 시선을 모니터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열려 있는 베란다.
미영은 잠시 자신의 몸과 사진속의 여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입고 있는 옷이 똑같았다.
미영이 이번에는 사진이 찍혀진 각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서 있는 곳에서 천장의 왼쪽 대각선 모퉁이에서 찍은 걸로 보였다.
미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돌려 방 천장 모퉁이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꺄아아아아악!!!”
미영이 거의 조건반사로 비명을 지른다.
천장 모퉁이에는, 눈 코 입이 너덜너덜 하고, 물에 퉁퉁 부은 얼굴이 하나 보였는데,
얼굴 곳곳에 살이 파여서 희끗한 뼈가 보였고,
아래로 쭉 찢어진 입술 사이로는 누런 치아도 보였다.
정말 참혹한 시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미영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얼굴이 남자친구의 얼굴이란 것쯤은.
‘이건 꿈일거야, 꿈일거야.’
미영이 눈을 질끈 감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점점 스잔한 기운이 느껴진다.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눈을 감는다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도움이 안 되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미영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흡......”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공포.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어느새 미영의 코 앞으로 다가온 남자친구의 얼굴이었다.
역겨운 시취가 후각을 괴롭힌다.
“흐, 흡, 흐흐흐, 흐흡”
미영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입가에서는 침이 흐른다.
남자친구의 얼굴이 미영의 얼굴과 살짝 닿을 정도까지 접근을 해왔다.
살이 파인 곳으로 꾸물거리는 허연 구더기들도 생생하게 보인다.
“슈위우어.”
남자친구의 너덜너덜한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움직이면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쥬위욱어.”
한 번 더 반복을 한다.
여전히 미영과 얼굴이 닿을락 말락하는 거리였다.
“죽어.”
세 번째 말했을 때, 그 괴상한 말이 정확한 의미로 들려왔다.
“더더더더더 너, 대대대대체 왜, 나나나나한테 이이이이러는 거거거야?”
미영이 몹시 떨리는 기색을 그대로 들어내며 말을 꺼냈다.
남자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미영을 바라보다가 슬쩍 눈동자를 모니터 쪽으로 돌린다.
공포에 떨던 미영도 따라서 눈동자를 돌렸다.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이게 꿈인 것 같지?]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지 않을 것 같지?]
모니터를 바라보는 미영의 눈동자가 떨린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더욱 강렬한 냄새가 미영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후우...”
박경장이 담배 연기를 크게 내뿜는다.
몹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걸 자살이라고 해야 되나요? 대체 왠...”
김순경이 바닥에 주저앉아 시체를 살피며 말했다.
냄새가 심한지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익사체인데. 방 안에서 익사를 했다는 게 말이나...으윽.”
시체를 건드린 김순경의 손에서 끈적끈적한 물기가 느껴졌다.
피부나, 체모 등이 섞여서 몹시 불쾌한 끈적임이었다.
박경장은 우두커니 선 채 말없이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얼굴 부분을 중점으로 보고 있었다.
반쯤 빠져버린 긴 생머리와, 늘어진 입술, 그리고 얼굴 곳곳에 살점이 파인 곳으로 하얀뼈가 보였다.
아무리 봐도 물에 빠진지 며칠은 지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걸 뭐라고 보고해야 하나. 감식반 놈들이 보면 3일은 된 시체라고 할 텐데.”
“그러게요. 이거 괜히 우리만 덤탱이 쓰는 거 아닌지 몰라요.”
담배 하나를 다 핀 박경장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꽁초를 던지고는,
한 손에 쥐고 있던 비닐장갑을 손에 끼기 시작했다.
“아흐... 이 냄새, 점점 심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이 정도면 후각이 안 느껴질 법도 한데.”
역겨운 냄새 때문인지 표정을 몹시 찡그리며 말을 하는 김순경.
몸을 일으켜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들이 밀어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경장님. 그 새끼가 그 형석인지 현석인지, 피해자 전 애인의 형이 아니라고 했죠?”
“그래, 아니래. 전혀 연관 없는 사람이었어. 트럭 운전수라고 했나? 게다가 취조할 때는 자기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더라고.”
박경장이 말을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가 마우스를 슬쩍 움직이자 시커먼 대기 화면에서, 순식간에 밝은 윈도우 화면으로 바뀐다.
“아까 데려갔었어야 했어요. 괜히 신경써주다가 우리만 곤란하게 됐네요. 휴...”
김순경이 여전히 베란다 밖으로 얼굴을 뺀 채 말했다.
“......”
하지만 대꾸가 없는 박경장.
“흠, 흠. 경장님 기분도 꿀꿀한데 오늘 순마 타고 바다나 보고 올까요?”
별다른 대꾸가 없자 민망했는지 김순경이 헛기침을 몇 번하며 말을 잇는다.
“......”
“음, 저 경장님?”
베란다에서 슬쩍 얼굴을 배는 김순경.
“아, 경장님 왜 갑자기 말이...”
뻘쭘한 표정으로 박경장에게 고개를 돌리던 김순경이 순간 말을 멈춘다.
모니터를 쳐다보는 박경장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진지하다기 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경장님? 경장님? 왜 그러세요?”
의아한 표정으로 김순경이 다가간다.
그리고 살짝 허리를 숙여 박경장의 어깨위로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김순경도 경악에 휩싸인다.
“이, 이, 이게 대체?”
......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정말 죄송해요. 제발, 제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하세요. 제가 싹싹 빌게요. 예? 제발요.]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이게 꿈인 것 같지?]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지 않을 것 같지?]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저, 경장님. 수, 수배 내릴까요?”
김순경이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잠깐 기다려봐. 이, 이거 좀 이치에 안 맞잖아. 이 사람 자살했는데...”
“그야 뭐 다른 사람이 접속했을 수도 있죠. 지금 바로 수배...”
“기다려봐! 이사람 아직 접속 중이야.”
박경장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킨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당신 누구야?]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미영이 아니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유미영씨 죽었습니다. 당신 뭔가 알고 있나요?]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미영이 아니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경찰입니다. 수사에 협조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미영이 아니네?]
“지금 저 새끼가 우리 갖고 장난 노나!!”
뒤에서 보던 김순경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박경장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 유미영(힘들다...)님의 말 :
당신 누구야. 함부로 남의 아이디 도용하면 범죄인거 몰라?]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 김형석(죽어)님의 말 :
미영이 아니네?]
“아 저 새끼랑 말 안 통합니다. 그냥 수배 내리고, 저 새끼 잡아다 족치죠. 예?”
“후... 그래. 어쩔 수 없지. 별 미친놈이 다 있네.”
김순경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 들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야, 야 잠깐만 끊어봐. 끊어봐!”
“에,,,예? 왜, 왜요?”
박경장이 모니터로 눈짓을 보낸다.
[김형석(죽어)님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아, 이거 보나마나 또 똑같은 말 쓰겠죠 뭐.”
“이번엔 내가 말을 건 게 아니잖아. 잠깐만 기다려봐”
......
[ 김형석(죽어)님의 말 :
너네도 죽어.]
......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그 사이 몇 마디가 더 전해져 온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박경장이었다.
“저, 전화해. 수배 내려. 이 새끼 뭔가 관련있어.”
“아... 아....”
김순경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나지막한 신음소리 뿐.
“왜 그래 김순경. 야! 김건호!”
박경장이 소리치며 김순경의 얼굴을 살폈다.
시선은 위쪽으로 향해 있었고, 몹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박경장이 김순경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천장 왼쪽 모퉁이로 말이다.
......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지 않을 것 같지?]
......
[ 김형석(죽어)님의 말 :
죽어.]
* 출처 : 공게-건방진똥덩어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