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1]

32 보땅이 | 2020-09-30 09:01:50 | 조회 : 1200 | 추천 : +1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어둠이 잔뜩 실려 있는

공허한 거실 내부엔 간헐적으로 울려퍼지는 시계 종소리만이 유일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덕구는 듣기 싫은 소음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썼다.

종소리는 느린 속도로 정확히 열두 번 그의 귀를 갈갈이 찢어

놓더니 이윽고 요란한 소리를 멈추었다.

열두번의 소리가 모두 울리자 그는 이불 속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다.

황량한 느낌마저 감도는 거실 모퉁이엔 그의 아내가 들여 놓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요지부동의 자세로 우두커니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잠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버릇처럼

베란다로 향하였다.

베란다엔 화단에 심어 놓은 작은 아카시아 나무의 수수한 향이

물씬 베어있었다. 감미로운 향을 음미하며 덕구는 베란다 너머

로 휘황찬란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유유히 바라보며 잠시 사색

에 잠겼다.


“딩동!”


베란다에서 나온 그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별

안간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며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인터폰 속에는 밝은 베이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소포 왔습니다.”


‘소포?’ 덕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소포라니요?”


“추석 연휴로 인하여 배달이 많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주문

하신 물품은 일정보다 미리 배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내는 주구장창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배달량이 많아서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배송이 지체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을 설치던 차였는데.”


덕구는 그렇게 말하고 얼른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재꼈다. 사내는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여기, 주문하신 물품입니다.”


그가 힘겹게 마룻바닥에 박스를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덕구는 의아

한 얼굴로 박스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요 근래에는 물품을 주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또 쓸 데 없는 화장품

이나 옷가지들을 주문한 것이라 생각했다.


“춥죠?”


덕구는 보은 통에 담긴 따듯한 커피 한잔을 사내에게 건내며 물

었다.


“일이 일인 만큼 정말 추위를 타는군요. 이제 겨울은 다 지났는데

도 추위는 가실 줄 모르니….”


그는 따듯한 커피 잔에 손을 녹이며 말하였다.


“밤늦게까지 고생하시네요. 저희 집이 마지막 배송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내가 커피로 몸을 녹이며 대답했다. 순간 문득 덕구의 머릿속에 무

언가가 번뜩이며 떠올랐다. 그것은 영국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 구입한

고급 양주였다. 평소 그가 워낙 닳도록 애지중지 하던 것이라 그 자신

도 몇 모금 맛을 보지 못한 술이었지만, 유독 찬장에 키핑해놓은 그

애물단지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도 깊었는데, 돌아가는 길이 성치 않겠습니다. 들어와 조금 쉬었다 가시죠.”


덕구는 조심히 입실을 권하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술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다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잠도 안 오던 차에 이야기 친구라도 필요했는

데 잘 됐습니다. 같이 술이나 마십시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고개를 꺾고 정중히 인사하며 사내가

집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덕구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찬장 깊숙이

들여놓았던 양주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저 택배 박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구는 식탁 위에 양주잔을 세팅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가 황

당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걸 저한테 물으시다니요. 주문하신 선생이 더 잘 알 터인데.”



사내의 말에 덕구가 가볍게 코웃음쳤다.



“아뇨. 저는 물품을 주문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면 제 아

내가 주문했겠죠. 또 쓸 데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군요.”



사내는 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구는 말없이 사내의 잔 한가득 양주

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는 사

내를 보고 덕구는 부드럽게 말하였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계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덕구가 건 낸 술을 기울였다.


“근데 사모님은…?”


사내는 원샷한 양주가 독한 지 미간을 찌푸리며 덕구에게 물었다.


“아, 오늘 동창회가 있다고 늦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 예”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니, 선생께서는 아까 사모님이 저 박스를 주문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게 사모님께 커다란 민폐가 되는게

아닌가 해서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렇게 밤늦은 시간

에 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불청객이잖습니까?”


“그런 걱정이라면 안 해도 됩니다. 아내는 내일 오후에나 들어

올 것이니.”



덕구는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박스를 바라보던 사내는

한시름 걱정을 놓으며 덕구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군요. 헌데 선생께서는 어떠한 직종에 몸을 담고 계십니까?”


그렇게 묻고 그는 말없이 덕구의 빈 술잔을 채웠다. “하하!” 사내

의 물음에 너털 웃음을 지으며 덕구는 쑥쓰러운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제 작년까지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출판사와의 계약이 해지되면서 손을 놓고 말았죠. 그 이후로는

이렇게 만년 백수처럼 놀고 먹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는 큰 소리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

이 그를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혼자 웃던 덕구는 무안한

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가 떨어졌네요. 땅콩 좋아하십니까?”


그는 주전부리를 찾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였다.


“아, 전 괜찮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덕구의 사려를 극구 거부하던 사내는 “집을 좀 둘러봐도

괜찮겠습니까?” 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조근

조근 발걸음을 옮기며 어딘가로 향하였다. 다름 아닌 어둠이 자욱이 깔린

거실이었다. 덕구는 불쾌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 저곳을 누비던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괘종시계 앞이었다.

그가 시계를 어루만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대 주택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괘종시계네요.”


주방에서 안주거리를 찾던 덕구는 사내의 말에 짐짓 밝게 웃으며 대

꾸하였다.


“아내가 구입한 건데 아주 애물단지랍니다. 저것 때문에 요새 잠을

제대로 못들죠. 아주 미치겠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사내는 시계를 어루만지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안경을 고쳐쓰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다면, 선생이 쓰셨던 소설이 어떤 부류인지 말씀해주시

겠습니까?”


덕구는 한 줌 가득히 들고 있던 땅콩을 그릇에 담으며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하십니까? 그걸 들으신다면 저를 싸이코라 생각할 게 분명

한데두요.”

“천만에요. 말씀해보세요.”


“정 원하신다면….”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공포소설을 즐겨 씁니다만은, 혼령이나 귀신 혹은 사후세계

같은 미지의 세계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게 소설이

라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지만요. 저는 언제까지나 비현실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배제하고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글을 씁니다. 그런 유령

이나 귀신 목격담등 다소 비현실적이고 식상할 수 있는 부분들은 현대

공포와는 거리가 멀죠.”

“그렇다면 선생께서 다루는 분야는 어떤 것들입니까?”

“음,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나 특정

대상에 대해서 쓴다고 하면 그건 설명문이나 논설문에 그치겠죠. 소설이

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란 바로 허구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어려웠나요?”


덕구는 신이 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소설의 기초 요소인 허구라는 개념을 배제하지 않은 채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쓰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공포에 대해서 쓰곤 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공포라던지, 두려움, 잔인성과 같은 것들요.”


“그렇다면 그런 글들의 소재는 어디서 찾는지요?”

“소재요?”

“그렇습니다.”

“음, 아무래도 소설의 컨셉이 일상적인 공포이니 만큼 일상생활

에서 소재를 찾겠죠?”


“예를 들면요?”

“흐음, 글쎄요. 저는 대게 생각을 많이 이용하는데 이런저런 생

각을 하다보면 가끔씩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주제도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플롯입니다.”



사내는 눈에 힘을 주고 덕구의 말을 사뭇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답답해 보이는 모자를 벗어 재꼈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돌

아와 식탁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

“네?”

“그럼 지금 상황을 놓고 당장 그 소재를 찾으라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요?”

“네.”


“글쎄요. 그게 그렇게 쉽게 찾고, 쉽게 글을 쓴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사내는 모자에 눌린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며 말하였다.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들었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금 이 상황에서 공포 소설에

필요한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하!”



덕구가 박장대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며 덧붙였다.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무슨 내기 말입니까?”

“한 사람씩 차례대로 지금 이 상황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여 소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제는 ‘공포’입니다.

소재가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룰로 말입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선생이 원하는 것을 드리지요.”


“원하는 것?”



덕구가 의아한 얼굴로 들었던 술잔을 놓았다.


“재밌군요.”


그러고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남아 있는 술을 목으로 털어넣었다.


“좋아요. 헌데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가 진다면?”


“만약 선생이 진다면 저는 선생에게서 소중한 것 하나를 앗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선생은 절대적으로 저에게 그것

을 주셔야 합니다.”


“뭐요? 그럼 내가 주기를 거부한다면요?”


“선생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내기가 끝나는 순간 저

는 자연스럽게 선생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난 뒤일테니

까요.”


사내가 씨익 웃어보였다.



“왜, 글이라는 것은 생전 써 본적도 없는 저에게 지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하하!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나중

에 다른 말 하기 없기입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죠. 그럼 순서를 정하도록 하죠.”

“먼저하시죠.”

“후훗”


사내의 얼굴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십쇼”

“말해보세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가 저 혼자만의 줏대라고 믿든

그렇지 않다고 믿든 어느 것이든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당

신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규칙입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죠?”

“저기를 보십시오. 저 괘종시계 보이십니까?”



사내는 거실 한 가운데 놓인 괘종시계를 가리키며 낮은 톤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까 집안을 둘러보다 저 괘종시계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아주 작고 나즈막한 소리. 저는 분명히 두 귀로 들었습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탁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며 마른 성대

를 축였다. 덕구는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저는 확신 하였습니다.”


“………?”


“저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고.”










“지금 농담하십니까?”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글쎄요. 제가 하는 얘기는 작은 농담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끔찍한 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생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입니다.”


사내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덕구는 괘종시계에

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무슨 근거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럼 아무런 근거 없이 제가 지어낸 말이라고 믿으십시요.

그것은 당신의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아마도…”


사내가 망설이듯 입을열었다.


“종소리는 시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머리와 종이 서로 부딪

히며 나는 소리일 것입니다.”


덕구는 떫은 감이라도 베어 문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확인해 보도록 하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덕구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가

두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건 안 됩니다.”

“왜요?”

“규칙을 잊으셨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선생은 내기에서

패한 것입니다.”


사내가 내세운 규칙이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선생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규칙입니다.’

사내의 불쾌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규칙을 어기고 내기에서 패하신다면 약속대로 선생은 저에게

‘소중한 것’을 주셔야 됩니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덕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이제 선생이 얘기 할 차례입니다.”


이제 바톤은 덕구에게로 넘어갔다.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듣고 나서야, 그는 조용히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맞은 편에는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득의연한 얼굴로 덕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팔목에 걸친 손목시계를 예의

가리키며 시간을 재촉하고 있었다. 덕구는 다급해졌다.


“좋습니다.”


잠자코 머리를 굴려보던 덕구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럴려고 노력중입니다.”

“실은 말입니다.”


그는 마치 사내가 모르고 있던 치명적인 비밀 하나라도 고백

하려는 듯 망설이며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제법 눈치가

빠르신 분인 줄 알았는데 유감이군요.” 라고 연이어 전하며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내었다.

사내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실은 당신이 마신 술잔에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많이 취하셨군요.”

“제가 농담하는 것 같습니까?”

“재미있네요.”

“지금 저는 당신의 술잔에 독을 묻힘으로써 살인을 저지른 것

입니다. 살인도 엄연히 공포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나 보군요.”


덕구는 거드름을 피우며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수상한 자에게 함부로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보십쇼.” 덕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재밌는 소재였습니다. 이제 다시 제 차례군요.”


다시 사내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까닭모를 불안감이 다시금

덕구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제 경험담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사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역시 믿던 안 믿던 선생의 자유이고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참을 뜸 들이던 사내가 드디어

어눌한 어조로 말을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아까 자정을 넘길 무렵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저는 마지막

남은 택배의 수취인이 선생의 집 주소로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죠.

그 때까지 제 머릿속에는 오직 단 한가지 생각뿐이 없었습니다.

빨리 이 귀찮은 물품박스를 집주인에게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

가서 휴식을 취해야 겠다고.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곳

선생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시간은 12시 정각을 가리

키고 있었죠.”


사내는 목이 타는 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그래서요?” 덕구가 어린아이 보채 듯 그렇게 물었다.


“차 시동을 끄고 선생의 집 주소로 되어 있는 택배 상자를

꺼내기 위해 트렁크를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내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마치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덕구는 그런 그의 이야기가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한 참을 주저하다가 그가 꺼낸 말은 무언가를 목격했다는 것

이었다. 덕구는 점점 조바심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러십니까?”

“그 전에 약속 하나 합시다.”

“약속이라니요?”

“제 이야기를 듣고 흥분하지 않기로요.”

“하하. 점점 궁금하게 만드는군요. 알겠습니다.”


덕구는 사내의 다음 얘기가 빨리 듣고 싶어 대충 지껄였다.


“제가 본 건 분명 살인이었습니다.”

“살인이요?”


고양이 눈을 치켜 뜬 채, 놀라 되묻는 덕구에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괴한이 중년쯤 되 보이는 여성을 날카로운 흉기로 무자비

하게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덕구는 심각한 얼굴로 사내의 말에 반응하였다.


“아직 놀라시긴 이릅니다. 그는 그녀를 잔인하게 토막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토막낸 사체를 어디론가 가져

가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그걸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뇨?”

“너무 무서웠습니다.”



사내의 말에 덕구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어느덧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

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식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선생의 집 앞에서 살인을 목격한 뒤, 저는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

하고 토막내서 어디론가 급하게 가져가는 괴한의 마지막 뒷 모습을

본 후에야 차 안에서 나올 수 있었죠. 그리고 선생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것입니다.”


사내의 말은 주구장창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은 말 안해도 선생께서 잘 아실겁니다. 선생이

베푸는 뜻밖의 호의에 저는 선생의 집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리고 선생과 술을 마시며 지금까지 얘기를 나눴던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까?”

“아뇨. 설마 이게 다라면 애초부터 이 얘길 선생에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얘기는 선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와 관련이 있다구요?”


그는 차가운 눈으로 덕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덕구는

사내가 무슨 얘길 하려하는지 도저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내는 무언가를 손짓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TV가 위치한 테이블이었다.



“선생,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까 제가 집안을 둘러보았을 때

말입니다. 그 때 저 사진을 보았습니다.”


사내는 TV가 위치한 테이블 언저리에 놓인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선생과 사모님이 함께 찍은 가족

사진 말입니다.”

“서, 설마. 당신 지금 무슨 소릴!!”

“제 얘기 안 끝났습니다. 설마 저와 한 약속을 벌써 잊으신겁니까?”


불안감이 덕구의 머릿속에서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 괴한에게 살해되던 중년의 여인은 바로 저 사진

속 사모님이셨습니다. 저도 집안을 둘러보다 저 사진을 보고 알았

습니다. 가족사진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부인의 얼굴은 괴한에

의해 살해될 때 그 고통스러워하는 얼굴과 사뭇 달랐습니다.”


사내의 말에 덕구는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이 식탁보 밑에서 요동 치고 있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두뇌가 계속해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여 동공이 작아지고 있었다.

사내의 말은 설마 하던 그의 예상에 정확하게 적중하고 있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려 하였지만 그러기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덕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쳤다.


“아무리 부인해 보아도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선생의

아내는 죽었습니다.”


“……”


“여기까지 제 얘기입니다. 역시 사실로 믿든, 믿지 않든

선생의 자유입니다.”


덕구는 사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믿지 않는

것은 선생의 자유입니다.’라는 그의 얘기에 꼬리처럼

따라 붙는 말은 수수께끼같은 사내의 말에 보다 큰 의문

을 남길 뿐이었으니.


“선생이 얘기 할 차례입니다.”


귓전에 울려퍼지는 사내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연신

그의 머릿속을 헤짚고 다녔다. 덕구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 담배 한대만 피고 하죠”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지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차피 사내가 하는 말 따위야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사실이 아

니니까. 재미삼아 시작한 내기가 아닌가? 녀석의 말에 동

요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비에 점차 조바심이

들었다. 다시 바톤은 덕구에게 돌아왔다. 은근한 눈짓을

보내던 사내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듯

연거푸 손가락으로 식탁 유리를 두드렸다. 조급한 마음에

덕구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후……”

“왜, 벌써 소잿거리가 바닥나신 겁니까?”

“그게 아니고……”

“……?”


들고 있던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끄며 덕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덕구는 침이 마르는지 마지막 남아 있는 한방울의 술까지

목으로 훌쩍 털어넘겼다.


“…… 한번 생각해 보시죠.”

“뭘 말입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살인을 목격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집 초인종을 눌렀어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인근의

경찰서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 길가로 나가서 이

사실을 빠르게 알렸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저 성가신 택배물만 선생에게 전해주고 이곳

에서 나가면 즉시 경찰서로 향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니, 단언컨데 당신은 그 사실을 경찰에 알리지 못했을

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필연적으로 이곳에 들어와야 했겠죠”

“결론부터 얘기해 주시죠.”

“좋아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겐 당신의 죽음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덕구의 말에 사내가 피식 웃어보였다.


“선생, 소재거리가 벌써 바닥나신 겁니까?”


‘큭큭!’ 연신 실소를 터트리던 사내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얘기했다.


“아니면 선생은 예지력이라도 기르고 있다는 것입니까?”

“예지력이라면 나보다 당신이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괘종시계안에 사람이 들어있을거란 생각을 했지?”


사내가 탁 앞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모르죠.”


덕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이어 사내의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쯤 되면 그것은 보통 (재미 삼아 시작한) 내기가 아니었다.


“이제 다시 제 차례군요.” 라는 말과 함께 사내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저도 담배 한대 핍시다.”


사내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그가 담배에 불을 지피자 덕구는

언짢은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뱉는 담배 연기가 바로 눈앞

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혹시 뭐 잊은 것 없습니까?”

“……?”

“저는 선생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하, 알고 있어요. 당신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죠.”

“그것 말고, 저 박스 말입니다.”


사내는 박스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진정 저 박스가 단순히 택배 상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무슨 소릴?”

“그전에 잊지 말아야 할 규칙 하나를 상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규칙이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던 선생은 그것의

진위여부를 확인해 볼 수 없습니다.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아요. 말해보시죠.”


그 순간 1시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사내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정말 저 박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이 안가십니까?”



사내의 말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저 박스 말입니다……”


까닭모를 낯선 곳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덕구는 궁금증만큼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쩌면 사내가 꺼낸 말의 이면에 머릿속을 간질이는

호기심과 그로 인한 알 수 없는 공포가 함께 도사리고 있는 것

인지도 몰랐다.


“역시 사실로 믿든 믿지 않든 선생의 자유의지이고, 거듭 말씀

드리지만 굳이 제 얘기를 믿으라고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어서 얘기해보시죠.”

“이 쯤 되면 눈치 빠른 이라면 대강 눈치 챘을 터인데……

그러고 보면 선생은 어딘가 둔한 구석이 있군요.”


한동안 사내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먼 산만 바라보

았다. 가만히 앉아 이죽거리는 그의 방관에 덕구는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재끼며 비장하

게 입을 열기까지는 10초도 채 안됬지만 덕구에겐 이 모든

순간들이 10년처럼 느껴졌다.


“선생과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도 연신 저의 머릿속을 헤짚고

다니던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뭐 말입니까?”

“그건 바로‘과연 저 비좁은 공간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까 말씀드렸었죠.”

“………?”

“사모님을 살해 한 그 괴한 이야기 말입니다. 괴한은 사모님

의 시신을 잘게 토막 냈습니다. 그리고 저 박스 안에 차곡차곡

담아냈습니다.”


“무…… 무슨!?”

“자, 이제 짐작 되십니까?”

“………”

“유감스럽지만 사모님의 사체는 저 박스안에 들어있습니다.”


“………개수작 하지마!”


“여기 까지입니다. 이제 선생이 얘기할 차례입니다.”


“당신!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인 줄 알아!?”


“선생의 차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내 얘기 시작하지! 너는 그딴 재수 없는 이야기를

내게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사내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하나 말씀드리죠. 선생은 저를 집 안에 들인 것을 후회

하게 될 것입니다.”


주구장창 입을 놀리던 사내의 턱에 묵직한 무언가가 강타했다.

별안간‘퍼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의자밑으로

넘어졌다. 덕구의 주먹이 사내의 턱을 강타하면서 살얼음판

같던 정적을 깼다. 사내가 의자 밑에서 다시 지껄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이 새끼가……!”


덕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고 있었다. 바닥에 널 부

러진 사내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실성한 듯 히죽거렸다.


“큭큭!”

“웃음이 나오지? 이 개새끼야!”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불길한 생각이 수면 위로 피어올랐다.

덕구는 부리나케 거실로 향했다. 단순한 미치광이가 나불대는

말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그래도‘혹

시나’라는 생각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괘종시계

문을 열어 재꼈다. ‘혹시라도…… 만약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씨발, 존나 안 열리네!”


쉽게 열리지 않는 시계 문을 억지로 잡아당기며 투덜댔다. 여전히

불길한 생각은 그의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퍽! 챙그랑!’ 그가 있는 힘껏 주먹으로 그것을 내려치자, 괘종

을 덮고 있는 유리가 파편을 튀기며 이리 저리 불규칙적인 모습으

로 깨지기 시작했다. 덕구는 황급히 시계 문을 뜯어보았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뭐야! 이 개새끼가 나를 가지고 놀아? 이 싸이코 새끼!”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계 안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

내는 실성한 듯이 연거푸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하…… 선생?”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덧붙였다.


“애시당초 장난삼아 시작한 내기 아니었습니까? 왜 그리 심각

하십니까? 크흣…… 제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지금 선생의 꼴을 보니 우습군요.”


“개소리 집어치워!”


“선생은 규칙을 어겼습니다. 이로써 선생은 저와의 내기에서

패하신 겁니다.”


“이런 개……!”


덕구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널 부러진 깨진 유리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부드득 이를 갈며 그것을 사내에게 집어던지며 외

쳤다. “개새끼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

무래도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 줘야 직성이 풀릴 듯한 눈이었다.

바로 그 때, 불현듯 박스가 놓인 현관에서 왠지 모를 비릿한 냄

새가 풍겨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어렴풋이 보이는 박스 틈새로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만히 서서 실눈으로 박스를 유심히 들쳐보던 덕구가 그 상황을

이해하는데까진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얼굴은 박스 안에서 지그

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명이 나오려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

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파묻힌 공포가 비명마저 삼켜버린 것

이다.


덕구는 박스안에 담겨있는 그 얼굴과 눈을 마주한 채, 멀뚱히 서

있기를 일관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에 놀랐는지 공포에 질린

눈동자였다.


“이럴수가……”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뜯어 내용물을 살펴 본 그의 시야에 들어

온 건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머리였다. 목 부위에 날카롭고 뾰족

한 도구로 사정없이 뜯겨져 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덕구는 기겁

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허어억! 우웨에에엑!”


‘마…… 말도 안돼!’바닥에 토악질을 하며 사내를 흘겨보려던

찰라 그제 서야 덕구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사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렇다할 틈도 없이 묵직한 물건

이 정수리에 강하게 닿는 기분이 들었다.‘퍼억!’ 둔탁한 마찰

음과 함께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건 사내의 불쾌한 웃음소리였다.


“약속대로 소중한 것을 가져가겠습니다.”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뜨듯한 액체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린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 *




“정신 차리시지요?”

능글맞은 목소리에 덕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릿해져오는

시야 너머로 사내의 얼굴이 들어온다.


“무…… 무슨 짓이지?”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십니까?”

“이…… 정신 나간 새끼!”

“제가 말씀 드렸죠. 이 내기에선 제가 이길 것이고, 내기에서

승리하는 순간 저는 선생에게서 이미 소중한 것을 빼앗고 난 뒤

일 거라구요. 어때요? 제가 틀렸습니까?”


“헛소리 집어치워!”

“어떻습니까? 선생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던 선생의 아내를 ‘담보’

로 한 내기가…… 즐거우셨습니까?”

“개새끼”


온 몸이 결박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아마 로프에 의해 단단히

묶인 모양이다. 사내가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

이터에 불을 붙이며 뒷 주머니에서 꺼낸 건 피가 흥건히 묻은

흉기였다. 덕구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저항하려

고 몸서리쳤지만 그럴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점점 힘없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포소재가 아닌가. 공포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이 그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꿈만 같은 상황이다.

어쩌면 전세는 애시당초 역전되어 있었고, 애초부터 주객은

전도되어 있었다. 사내가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사내의 말이 맞았다. 자신을 집 안에 들인 것을 분명히 후회할 것이라고……


그래. 처음부터 손해보는 내기를 시작한 것이다. 만약 내기

에서 이겼다고 해도 사내가 말한‘원하는 것’은 분명 아내의

머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부질 없다. 다 틀렸어. 이젠 끝이다.

사내가 덕구의 얼굴로 흉기를 가져다대며 속삭였다.


“꽤 아플 거야.”

“끄아악!!”


덕구의 비명이 속사포처럼 전해진다.




* * * * *




얼마나 지났을까. 망가진 괘종시계가 새벽 1시 반에 정지해

있었다.

거실 바닥엔 누군가가 힘없이 쓰러져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

가 주방에서 홀연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드리워진 어둠 새로

어렴풋이 드러난 얼굴은 다름아닌 ‘덕구’ 의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톱날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크게 당할 수도 있는 상황

이었다. 사내가 그의 얼굴로 흉기를 가져다대는 순간‘약효’가

나타난 것이다.

덕구는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가엾게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당할 뻔 했지 뭐야.”


시퍼렇게 날이 선 톱 날을 어루만지며 그는 잠시 사색에 잠

겼다. 그러고는 쓰러진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줄까?”


‘놀라운 사실……?’ 분명 사내의 숨이 조금이라도 붙어있

다면 그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덕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 녀석을 집으로 들였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네

녀석을,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말이야.”


덕구는 쓰러진 사내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내가 말했지. 난 수상한 자에게 함부로 자비를 베풀지 않는

다고. 네 녀석이 처음 초인종을 누를 때 말이지. 나는 그 때 주

방으로 향했지. 그리고 네 녀석과 함께 마실 술과 네 녀석의

술잔을 준비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


덕구는 식탁 위에 놓인 사내의 술잔을 들며 연신 말을 이었다.


“아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네 녀석 잔에 독을 묻혔다

고 한 적이 있었을거야. 네 녀석은 독이 묻어 있는 이 잔으로

신나게 술을 퍼 마셨고, 그러니까 네 녀석이 머리가 나쁜거야……”


‘슥삭. 슥삭.’ 덕구는 톱을 좌우로 흔들며 사내의 목을

톱질하기 시작하였다. 연약한 피부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톱

날에 의해 순식간에 초토화되기 시작하였다. 부드러운 고기

처럼 싹둑 싹둑 잘리는 살점들 사이로 봇물처럼 터지는 붉은

선혈이 덕구의 얼굴에 빨갛게 물을 들였다.


“물론 하마터면 내가 당할 뻔 했었지. 흉기를 든 네 녀석

에게 이기기 위해선 독의‘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했지. 뜻 밖에도 네 녀석이 수상한 내기를 제의하

더군. 나야 고마웠지.”


덕구는 사내의 머리를 완전히 잘라내었다. 잘려나간 사내의

눈동자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보였다. 덕구는 두꺼운 노끈을

사내의 머리에 연결했다. 그리고선 괘종시계의 문을 열었다.


“괘종시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을 거라고? 미래를 보는 예지력

하나 만큼은 탁월하군 그래.”


‘딩, 철퍽!, 딩, 철퍽, 철퍽……!’


잠시 후 괘종시계의 종이 대롱대롱 매달린 사내의 머리와

부딪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에필로그.


‘댕, 댕, 댕, 댕…’


젠장, 저 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되는 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덕구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요지부동의 자세로 요란하게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가

어둠이 자욱이 깔린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냉장

고에는 동창회가 있을 것이라며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아내의 쪽지가 붙어있었다. 그는 주머니속에서 담배를 꺼

낸 뒤 버릇처럼 베란다로 향하였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겨있던 그의 눈에

불현듯 무언가가 스치듯 들어왔다. ‘또각 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걷고 있는 여인이었다. 조그마한 핸드백에

도트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그의 아내였다.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아내를 부르려던 찰라였다.

그 순간 그녀의 뒤를 곤색 점퍼에 밝은 베이지색 야구모자를

걸쳐 쓴 한 사내가 바짝 따라붙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의 오른 손에는 커다란 ‘박스’가 들려 있었다. 덕구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눈 앞에

서 아내가 살해 되는 광경을 우두커니 지켜보며 그는 꼼짝달

싹도 하지 못했다. 몸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을 처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내는 들고 있던

박스에 여인을 담기 시작했다. 팔…… 다리…… 몸통……

차곡차곡. 그리고 마지막 케이크의 꽃 장식을 올리듯 여인의

머리를 그 위로 담아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딩동…… 딩동! 소포 왔습니다.’

덕구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향하였다

공포/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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