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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종결.jpg [12]

중장 푸르스트 | 13-10-18 20:47:28 | 조회 : 8724 | 추천 : +23





지만원의 5.18 무기고 관련 주장이 틀린 이유


지만원이 5.18 17개 지역에서 꼭꼭 숨겨져있는 38개 무기고가 4시간에 털렸다고 말하시며 미스테리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보아 한번 이것을 파헤치려 봅니다

 

1. '꼭꼭 숨겨져있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바라보니 이러한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70년대 중반부터 지역방위를 위해 예비군 무기고가 각 파출소·경찰서·직장등에 있었습니다. 현재는 아니지만요

 

 

 

 

1982년 3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대구시 중학생 2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털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중학생들도 무기고를 털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기고 체계가 허술했으며 시민들에게 잘 알렸는지 알 수 있죠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 아시나요 ? 우범곤씨가 총기를 탈취 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죽인 사건이었는데 당시 의령경찰서에 있던 무기고가 털렸었죠.당시만 해도 무기고가 이리 허술했었고 무기고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시민들이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꼭꼭 숨겨져있었다] 며 하시면 안 되죠. 진짜 꼭꼭 숨겨져있었다면 그것을 [불순분자들이 어떻게 알았냐!] 하며 난리칠 사람들이 신군부였을테니까요

 

 

 

 

1980년 6월 4일 기사입니다 [당시만 해도 신군부 언론검열등으로 광주사태/불순분자등으로 쓰였습니다] 여기서도 5.18 이후 경찰및예비군의 무기관리에 대해 논란이 생긴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리고 오히려 무기고 위치를 몰랐던 자들이 간첩이었을 확률이 아주 높겠군요.. 한국 상황을 아예 몰랐다는 것이니까요.

 

2. 5월 21일 17개 시군에서 무기고 38개가 동시다발적으로 4시간만에 털렸다?

13시 00분 계엄군의 집단 총기사격 이후 본격적인 총기탈취에 들어갔는데요. 이후 털린 무기고들을 날짜/시간으로 정리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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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자료이기 때문에 과격한 단어 [폭도]등이 써져있습니다. * 전남 광산군 하남면은 현재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입니다.

* 당시 무기고 탈취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시민들의 증언입니다.

[광주매일] 正史 5.18 <94>

 

나주지역에 시민군이 최초로 진입한것은 21일 정오 무렵이다. 이때 민간인 시체를 실은 2대가 나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계엄군의 발포사실을 전하고 흥분한 주민들도 합세해 경찰서와 파출소의 무기탈취가 시작된다. 

당시 21세로 나주시 남외동에 살면서 육군방위병으로 시위에 참가해 10개월간 복역한 이재권씨(현기능공)의 증언 [그날은 석가탄신일이라 공휴일이어서 부대에 출근하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까운 갑오사에 놀러갔다. 점심식사를 하러 내려오는데 한 고교생이 계엄군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우리가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때는 군인들이 아니라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들이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 시위대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다. 5백여명은 될것 같았다.처음 광주에서 도착한 시위차량은 타이탄 트럭과고속버스였다 가차마다 시위대들이 타고 있었고 특히 트럭에는 시체가 몇구 실려 있었다. 

군인신분이었기에 처음에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힜으나 시체까지 눈으로 본 다음이라 혈기에 피가 거꾸로 솟는것 같아 그냥 있을수 없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모인 나주시민들을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사람들을 모조리 총으로 쏴죽이고 있으니 우리도 이에 맞서서 싸우려면 총을 들어야 합니다]라는 광주 시위대의 절규에 선선히 나서 파출소를 안내하고 습격한다. 

광주시민 몇백명이 트럭과 고속버스등을 이용해 시체를 태우고 나주로 내려와 시민들에게 같이 총을 들자 싸우자 호소했고 이에 나주시민들은 응하고 당시 무기고가 있던 파출소들을 안내하여 습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이쯤에서 일부 수구세력이 주장하는 [동시다발적에 어떻게 털렸나] [어떻게 위치를 알았느냐] 는 부셔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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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지만원씨는 광주의 분노라는 책을 인용해서 북한이 무기고 탈취를 사주했다느니 주장을 합니다. ▼ 은 지만원씨 주장인데 이에 대해서는 

[증31(“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1982.3.20.‘조국통일사’)의 546쪽에서 590까지 44쪽에 걸쳐 깨알 같이 기술된 상황일지(5.18직전 및 5.18과정) 역시 검찰 및 군인, 안기부, 치안본부 일지보다 더 자세하다. “짙은 가스 연기 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1대(광전교통소속 전남5에이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 섰을 때 계엄군 100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 ”(증31, 576하5-8줄). 남한 자료 어디에도 차번호까지는 기록된 게 없다.

'광주의 분노'(증38)의 36쪽에는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고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다. 안기부 자료 및 검찰보고서와 비교를 해보니 북한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료(증8 57쪽) 및 검찰자료(증9 101쪽)에는 '화순군'의 '동면지소' 등 4개지서의 무기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는데, 북한자료에는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통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로 특정하고 있다. 라주군의 5개 경찰서에 대한 기록도 북한자료 증 38(36쪽 상단 3개줄)이 훨씬 더 정확한 것이다.]

1.http://asegaew.egloos.com/3460125

2.http://asegaew.egloos.com/3435319

광주의 분노 책을 해부한 이글루스 블로그의 글을 링크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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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만원은 '4시간'을 언급하며 '특수한 훈련을 받지않는 이상 어떻게 가능하냐'고 시스템클럽에 이런 글을 올리신 걸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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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라도 전 지역/동시다발적/무기탈취/4시간만에] 그런데 이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밑은 시민들의 증언입니다.


[22일 시위대는 새벽부터 해남읍-마산면-황사면-문내면-황원면을 돌며 시위를 벌이고 오전에는 해남읍-옥천면 -계용면-강진읍-영암읍-목포시로 시위지역을 넓혀 나간다.  이들은 시위도중 계곡지서 ,옥천지서 송지면 월송지서등 6개 지서에서 많은 무기를 획득하고 오후 5시 30분께는 해남경찰서 무기고를 부수고 M1과 칼빈 4백정을 탈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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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끝났는가 159페이지>

 

5월 22일 무기고 탈취 일지입니다. 시스템클럽에 올라온 글에는 13시 00분부터 4시간만에 전라도 전 지역에서 무기고가 털렸다 주장하는데 지도에 표시된 해남지역등은 5월 22일 오후에나 무기고가 탈취됐습니다. 

 

그렇다면 지만원 박사나 시스템클럽서 주장하는 4시간만에 전 지역에서 털렸다는 것은 거짓으로 드러났는거죠.

 

또한 


시스템클럽에 올라온 <지도15>에는 <무기고>가 써져있지 않습니다. 시위의 확산 그리고 시위지역과 교전이 있던 지역을 표시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시위의 확산 (5.21. 13.00 ~    ) 이것을 좀 보시기 바랍니다. 5월 21일 13시 00분부터 본격적으로 시위가 확산됐고 5.18 당시 전남 지역 시위지역과 교전지역을 표시한 것이지 5월 21일 오후 13시 00분에서 4시간동안 무기고가 털린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 지도에선 광주에서 제일 먼 지역이 완도지역으로 시위대가 최초로 완도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21일 오후 10시입니다. 5.18을 폄훼하고 싶다고 두루뭉실하게 전라도 전지역/동시다발적/4시간으로 묶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보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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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애 4시간 타령 자체가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변명이죠. 

일베에서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고 의심스럽다고 해서,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 6.3 항쟁, 6월 항쟁, 부마 항쟁 등 다른 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팩트로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일베에서 새로 내세운 의혹이 있습니다.

 

북한 인사가 5.18 국립묘지만 참배했기 때문에 북한이 특별히 여긴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인사는 4.19 묘지, 3.15 묘지도 참배했습니다. (6.3 항쟁, 6월 항쟁, 부마 항쟁에서는 사망자가 없거나 소수이기 때문에 사건 관련 묘지를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1) 기사 제목 : 북한측 인사 4.19국립묘지 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8차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한 북측 인사 5명이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를 방문, 참배했다.

북측 인사가 4.19 국립묘지를 공식 참배한 것은 1995년 4.19묘지가 국립으로 승격된 뒤 처음이라고 묘지관리소 관계자는 전했다.

이날 4.19 묘지를 방문한 인사는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련행 피해자보상 대책위원회(조대위) 홍선옥 위원장, 조대위 손철수 서기장, 김춘실 위원, 민족화해협의회 안명국 부장, 리동석 부원 등 5명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19/2007051900194.html

 

 

(2) 기사 제목 : 마산, 창원에서 남북 노동계 화합

 

원형국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리충복 6.15 공동선언 실천 북측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측 대표단원 20여명은 이날 낮 3.15 국립묘지를 방문했다.


3.15 의거탑에 헌화한 뒤 묵념한 북측 대표단은 3.15 의거 당시 숨진 김주열 열사의 묘를 참배했다.



'남북 노동자 상봉 모임'과 3.15 국립묘지 참배, 축구대회 등의 일정을 마친 양측 대표단은 북측 대표단의 숙소인 창원호텔로 자리를 이동, 경남지역 지방자치 단체가 주최한 만찬행사에 참가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622703

 

 

게다가 북한 8.15축전 대표단은 현충원까지 참배한 적이 있습니다. 

 

 

 

 

 

(3) 기사 제목 : 8·15북한 대표단, 현충원 참배


광복 60년을 맞아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이 국립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습니다.

 

한국전쟁,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려있는 현충원을 북한 당국이 참배하기는 분단 이후 처음입니다.


북한 대표단을 태운 차량이 현충원 정문을 통과합니다.

 

북한 대표단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곳에 들어선 것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88192

 

 

북한 대표단이 현충원을 참배한다는 것과 같이, 북한이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참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의 남한 묘지 참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북한이 6.25 남침을 반성했기 때문에 현충원을 참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북한 인사가 국립묘지만을 방문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한을 방문한게 아니고, 남한 측이 제시한 일정에 따라 북한 인사가 광주에 방문한 김에 5.18 묘지를 들르고, 서울에 방문한 김에 4.19 묘지나 현충원을 들러 참배했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마치 북한 당국이 방북한 남한 인사가 북한이 짜놓은 일정에 따라 북한의 묘지에 참배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5.18 최초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씨

 

 

 

근거1 (사망자 검시 자료) 1980년 6월 보안사령부가 5.18 민주화운동 사망자를 검시하고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 보고'라는 문건입니다. 사망자 검시 자료의 사망경위에는 '계엄군-병실'이라고 나와있으며, 19일 새벽 3시 타박상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근거2 (국방부장관의 증언) 아래 周피고인은 1980년 5월 당시 주영복 전 국방부장관입니다. 1996년 5월 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 공판에서 주영복 전 장관은 김경철씨가 시위 진압으로 발생한 최초 사망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蔡검사=공수부대원들이 그날 금남로에서 시위를 해산하며 강경진압을 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있나요.

 

周피고인=19일 밤에 들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참고 기사) 

 

 5월 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19일 새벽 3시 결국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5981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을 몰랐다는 왜곡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집권기도와 과잉진압에 저항한 운동입니다. 그런데 5.18 왜곡세력은 광주시민은 전두환도 모른 채로, 아무 목적없이 시위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 당시 사진을 보시죠. 전두환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금남로의 시위차량에 '전두환 찢어죽여라'라는 현수막이 걸린걸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버스에 '계엄해제, 전두환 씹어먹자'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사진도 있습니다. 사태수습위원회 차량도 보이는군요.

 

 

세번째로, 트럭에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는 팻말이 달린 사진도 있습니다.

 

 

넷째, 전두환 화형식도 거행됐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종북 구호는 없었다.

5.18에서 광주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 '김일성아 내려오지 마라' 등 반공구호도 외쳤습니다. 북한간첩이 조장한 사태라면, 그런 구호를 외치도록 내버려뒀겠습니까?

 

 

5.18 광주항쟁 당시 기자로 광주에 잠입해서 취재하던 조갑제의 증언입니다.

 

 

조갑제는 또한 “광주 학생 운동이 북파공작원에 의해 일어나거나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이고, 본인이 그 당시 현장에서 구호를 들어보니 김대중 지지 구호는 거의 없었다며 그 당시 가장 많이 불리우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것이었다면서 “광주 운동은 반공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http://www.independent.co.kr/news/article.html?no=5030

 

 

시위에 직접한 광주시민들의 증언입니다.

 

시위차에 탑승하여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그때는 광주 시민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김영호 증언)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6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1%E8%C0%CF%BC%BA%C0%BA&sop=and

 

5월 18일 이전에 학생들이 주로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학생 자율활동 보장하라' 등이었고 5월 18일이 넘어서는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일성은 오판 말라. 계엄군을 몰아내자. 전두환 찢어 죽이자. 내 자식 살려내라' 등의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구호들이 많았다.(박영순 증언)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50&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1%E8%C0%CF%BC%BA%C0%BA&sop=and

 

지금도 그들이 외치던 구호 중에 '김일성아, 내려오지 말아라' 던 구호가 생생하게 기억난다.사람들은 로터리 부근과 인동에 모여서 그러한 것들을 구경하고 환호하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윤석진 증언)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1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1%E8%C0%CF%BC%BA&sop=and&page=2


왜 5.18 민주화운동에서 카빈 사망자가 더 많다는 조사결과도 있는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입니다.

 

보안사령부 505보안부대가 작성한 사체 검안 자료에는 M16 사망자가 카빈 사망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망자에 대한 보상을 결정하는 사체검안위원회에서 카빈 사망자가 더 많은 것으로 뒤바뀌었습니다.  M16 총탄을 맞은 경우 군에 저항한 것으로 판단하여 폭도로 분류되고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유가족에게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의사 2명과 목사는 최대한 비폭도로 분류하기 위해 카빈 사망자를 늘렸다고 합니다.



5.18이 종료된 뒤 보안사 주도로 사체검안위원회가 열렸다. 6월 초순 505보안부대에서 검안의, 목사와 기자, 법무관, 경찰관, 보안부대 장교 등이 모였다. 이들은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분류했다. 검안위원회는, 보안부대의 사체 개인별 신상자료를 보고 양민과 난동자(인용자: 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군에서는 M16 총탄을 맞은 경우 군에 저항한 것으로 판단하여 폭도로 분류하려고 했으나 의사와 목사들이 반대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라다고 하여 결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마지막까지 문제가 되었던 사망자는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 6.3시위, 6월항쟁, 부마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은 모두 기념합니다. 북한에서는 4.19 혁명을 '남조선인민봉기', 6.3시위를 '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을 '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을 '10월 항쟁'이라고 부르면서 사건의 발생일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매년 기념 보고회(기념식)을 열고 있습니다. 

 

 

북한의 4.19 혁명 기념보고회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3767957

 

북한의 4.19 혁명 기념보고회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015277

 

북한의 4.19 혁명 기념보고회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266577

 

북한의 4.19 혁명 기념보고회4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00419230212715

 

북한의 부마항쟁 기념보고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80395

 

북한의 6월 항쟁 기념보고회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552450 

 

북한의 6월 항쟁 기념보고회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5622 

 

 

북한이 자신들이 개입해서 기념한다기보다는,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주민들에게 4.19는 ‘4.19 봉기’ 또는 ‘4.19 인민항쟁’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당국이 4.19를 '반미, 반정부 인민항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해마다 4월 19일이 되면 영화 ‘성장의 길에서’가 상영된다. 3부작으로 된 이 영화는 한 남한 대학생이 4.19봉기에 참가해 투쟁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의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는 각종 통일관련 행사에서 불린다.

 

북한은 고등중학교 교과서와 혁명박물관에 ‘4.19 봉기'와 관련한 사진자료 등을 게재하고, 반미 반정부투쟁을 소개하고 있다. 북한은 남한에서 벌어지는 각종 노동쟁의까지도 반미투쟁으로 포장해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주민은 4.19를 반미투쟁으로 알고 있다.

 

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21228 

 

 

북한에 있을 때 ‘5.18민주화 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한국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2007년 북한을 떠나온 도명학 씨의 말입니다.

 

탈북자 도명학: 주로 보게 되면 미국 반대하는 목소리라는 게 없잖아요. 전두환의 계엄령을 반대하고 민주정부 수립하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다른 탈북자들도 북한에 있을 때 미국의 사주를 받고 계엄군이 시위자들을 진압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나와 여러 자료들을 보고 북한의 선전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위자들도 계엄군의 무기를 빼앗아 군부 정권에 항거했지만 그렇다고 이 행동을 북한이 가르치는 바처럼 반미투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남한의 주민들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위현장에 등장했던 구호들도 대부분 ‘비상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구호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주장이었습니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참고 자료) 북한의 4.19 기념 우표





 


지만원이 무죄판결받았으니 5.18은 폭동이다? 


1. 지만원이 명예훼손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


지만원이 5.18 명예훼손 재판에서 무죄판결 받은 것을 가지고, 5.18이 폭동이라거나, 북한개입이 있었다고 판결내렸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만원이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는 자신의 글에서 5.18유공자 단체 회원을 직접 지칭하지 않아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지만원의 주장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5.18 민주화운동 강경진압에서 피해를 입은 시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누가 피해를 입었는지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재판부는 "지만원이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아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875909


2. 지만원 5.18 명예훼손 판결문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그 발생 배경과 경과,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의 교전사태의 발생원인, 경과, 그 밖에 인명피해의 발생원인, 5.18 민주 유공자들의 지위와 그에 대한 보상, 예우 등에 관하여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여서 이 사건 게시글을 통하여 5.18민주유공자나 참가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지만원이나 극우인사가 아무리 5.18 폭동, 5.18 북한개입이라고 헛소리를 해도 법적, 역사적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평가가 확립됐고, 지만원의 글 정도 가지고는 5.18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바뀌지 않는다는거죠.

 

*지만원의 5.18 명예훼손 사건 1심 판결문 링크

http://file.scourt.go.kr/AttachDownload?file=1297036103820_084823.pdf&path=003&downFile=2010%20%20%20%2051.pdf 

 

*지만원의 5.18 명예훼손 사건 대법원 판결문 내용

http://i.imgur.com/p9UuTII.png

 

 

3. 지만원의 김대중 명예훼손 판결문

 

지만원은 김일성과 김대중이 짜고 5.18 광주에 특수부대를 보내 학살했다는 글을 썼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 유족으로부터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당했는데, 2013년 5월1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지만원이 인용한 탈북자들의 수기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일성의 공모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담고 있지 않으며,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 5·18 당시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이 신군부에 책임이 있어 전두환 등에게 사형이 선고됐던 사법판단과 5·18 민주화운동유공자예우법을 제정하면서 내린 입법부의 판단 등을 지만원이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6&aid=0002155661

 

 

4. 정리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만원의 주장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법적 평가를 부정하고 있지만,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어 5.18 명예훼손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지만원의 5.18에 관련된 주장에서 피해자가 특정될 경우에는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는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신원미상자 문제


5.18 민주화운동에서 신원미상인 시신이 12구에서 수십구된다면서, 신원미상 시신이 모두 북한간첩 등 불순세력과 연관 짓는 루머가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다.

 

2001년 광주광역시에서 실종자, 장기 가출자, 행방불명자 가족 282명의 유전자 대조작업을 벌여 신원미상 시신 11구 중에 6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권호영(당시 16세)·김기운(17세)·김남석(18세)·김준동(16세)·양민석(20세)·최숙일(21세)씨 등 6명의 시신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1980년 5월 27일 효덕동 뒷산에서 총을 맞고 사망한 4세 아이의 시신에 대한 검시자료


나머지 5구의 시신 중에서도 40세 가량의 남자, 4세 가량의 남자아이, 목포에서 비무장 상태로 차량 위에서 시위하다 추락해서 사망한 남성 등 적어도 3구는 불순세력과 연관짓기 어렵다.

 

40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cIM7D4E.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2U0atGT.png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사망자, 실종자가 수백명이 되는 대형참사에서 모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풍백화점 사건에서는 신원미상 시신이 30구, 대구지하철 참사에서는 신원미상 시신이 6구인채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5.18 민주화운동의 신원미상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전혀 많은 편이 아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204080211729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21103031007344


북한 인사가 5.18 묘지만 참배했나?


일베에서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고 의심스럽다고 해서,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 6.3 항쟁, 6월 항쟁, 부마 항쟁 등 다른 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팩트로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일베에서 새로 내세운 의혹이 있습니다.

 

북한 인사가 5.18 국립묘지만 참배했기 때문에 북한이 특별히 여긴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인사는 4.19 묘지, 3.15 묘지도 참배했습니다. (6.3 항쟁, 6월 항쟁, 부마 항쟁에서는 사망자가 없거나 소수이기 때문에 사건 관련 묘지를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1) 기사 제목 : 북한측 인사 4.19국립묘지 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8차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한 북측 인사 5명이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를 방문, 참배했다.

북측 인사가 4.19 국립묘지를 공식 참배한 것은 1995년 4.19묘지가 국립으로 승격된 뒤 처음이라고 묘지관리소 관계자는 전했다.

이날 4.19 묘지를 방문한 인사는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련행 피해자보상 대책위원회(조대위) 홍선옥 위원장, 조대위 손철수 서기장, 김춘실 위원, 민족화해협의회 안명국 부장, 리동석 부원 등 5명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19/2007051900194.html

 

 

(2) 기사 제목 : 마산, 창원에서 남북 노동계 화합

 

원형국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리충복 6.15 공동선언 실천 북측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측 대표단원 20여명은 이날 낮 3.15 국립묘지를 방문했다.


3.15 의거탑에 헌화한 뒤 묵념한 북측 대표단은 3.15 의거 당시 숨진 김주열 열사의 묘를 참배했다.



'남북 노동자 상봉 모임'과 3.15 국립묘지 참배, 축구대회 등의 일정을 마친 양측 대표단은 북측 대표단의 숙소인 창원호텔로 자리를 이동, 경남지역 지방자치 단체가 주최한 만찬행사에 참가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622703

 

 

게다가 북한 8.15축전 대표단은 현충원까지 참배한 적이 있습니다. 

 

 

 

 

 

(3) 기사 제목 : 8·15북한 대표단, 현충원 참배


광복 60년을 맞아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이 국립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습니다.

 

한국전쟁,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려있는 현충원을 북한 당국이 참배하기는 분단 이후 처음입니다.


북한 대표단을 태운 차량이 현충원 정문을 통과합니다.

 

북한 대표단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곳에 들어선 것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88192

 

 

북한 대표단이 현충원을 참배한다는 것과 같이, 북한이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참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의 남한 묘지 참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북한이 6.25 남침을 반성했기 때문에 현충원을 참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북한 인사가 국립묘지만을 방문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한을 방문한게 아니고, 남한 측이 제시한 일정에 따라 북한 인사가 광주에 방문한 김에 5.18 묘지를 들르고, 서울에 방문한 김에 4.19 묘지나 현충원을 들러 참배했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마치 북한 당국이 방북한 남한 인사가 북한이 짜놓은 일정에 따라 북한의 묘지에 참배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1980년 5월21일 20사단 지휘차량 탈취는 계획적으로 이뤄졌다?


지만원은 1980년 5월21일 지휘차량 14대 탈취가 계획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지만원 글의 일부입니다.


공수부대를 능가하는 담력을 가진 300명의 특수군중이 매복해 있다가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지휘부를 공격하여 와해시켰다. 

아시아자동차에 집결한 위의 600명 중 300명은 5월 21일 오전 8시 정각에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한 후 톨게이트 주변에 화염병 등 폭발물을 준비해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08:00시 정각에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하여 지프차 14대와 기관총 및 무전기들을 탈취한 후 곧바로 아시아자동차로 가서 또 다른 300명과 합류했다. 이런 행동은 지휘자 없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 먼저 20사단 작전일지와 지만원의 글을 비교하여 지만원이 틀린 부분부터 지적하려고 합니다. 20사단 작전일지를 보면 시위대가 '지휘부'를 습격한게 아니고, '지휘차량 14대'가 습격받아 탈취됐습니다. 탈취된 장소도 광주 톨게이트가 아니라 광주공단입니다.

작전일지에 따라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80년 5월 20일 20사단 61연대가 광주공단에서 일어난 시위대 2천명 규모 시위를 진압하러 나갔지만, 시위 진압 작전이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오전 9시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20사단 지휘차량이 10분 뒤 광주공단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죠. 전투교육사령부(CAC)에서 착오가 발생하여 안내병을 배치하지 못 한 상태였고요. 시위대는 군이 철수한다고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광주공단으로 오는 지휘차량을 공격했고 차량 14대가 탈취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정체불명의 집단이 극비사항인 차량이동을 입수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진압병력이 출동할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서 이목을 집중할 리가 없었겠죠. 

20사단 작전일지 (80년 5월20일~5월21일)

■80년 5월20일 
  ◇20:00 광주 지역 일원 소요 군중 10만명 으로 치안 마비 지역내 군. 경찰력으로 치안 유지 불가. 20사단 1개 연대 병력 투입 지시 접수(20:00) 육작명 80-21호 
  ◇22:30 61연대 용산역 출발-송정리역 앞 04:00시 도착 상무대 집결 
  ◇22:30 20사(-) 병력 추가 투입 지시 접수 육작명 80-23호 

■5월21일 
  ◇02:30 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용산역 출발-송정리 08:58도착(상무대 10:00 도착 작전 준비) 
  ◇08:00 광주시 공단 입구 일원으로 소요 진압 차 61연대 출동했으나 소요 군중의 과열된 소요로 진압 작전 불가 복귀(인원 82/1413명, 차량 40대) 

{ ◎집결 소요 군중 2000명으로 극도로 흥분된 상태이므로 61연대장이 소요 군중 대표자와 대담을 통해 공수 부대와 같은 방법의 진압 작전이 불가함을 판단하고 복귀를 사령관께 건의 승인 하 복귀 
◎효과: 20사단 병력에 대한 광주 시민의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 

  ◇08:10 지휘 차량 육로 이동 광주시 공단 입구 도착 시 차량 1/4톤 14대 피탈, 인원 2명 부상, 1명 실종, 잔류 25명 12:00시경 탈출 복귀. 실종자 1명 이후 생존 확인(62연대 상병 박윤수) 

{ ◎서울 출발 직전 사단 군수 참모가 3군 군수 참모에게 지휘용 차량 14대가 육로 이동하니 CAC군수 참모에게 통보를 요청, 3군 군수 참모가 CAC군수 참모에게 전달했으나 CAC에서 안내병 배치 조치 미 실시로 상황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광주 시내에 진입하므로 써 발생됨} 



2. 당시 광주 광천동에 있었던 광주공단에서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까지 따로 차량을 동원해야 될 정도로 먼 거리도 아니죠. 걸어서 몇십분 내에 도달할 수 있을겁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존재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광주공단에서 굳이 지휘차량을 습격해서 정체를 노출할 위협을 무릅쓰고 차량을 탈취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육상교통 중 도로교통은 도심에 분산되어 있던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광천동의 광주공단이 주변공단으로 이전한 터에 광천동종합버스터미널로 통합·확장해 이용자들이 편리하게 되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인 반대가 없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이 전두환을 몰랐다는 주장에 관해서, 저는 전두환을 겨냥한 플랜카드 사진, 전두환 화형식 사진과 같은 근거로 전두환을 모르지는 않았다는 글을 쓴 적 있습니다.. 


하지만 5.18 당시 전두환의 이름을 모른 채로 시위에 참여했다는 증언 등을 내세우면서 광주시민은 전두환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선동당했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보고 시위에 참여한 경우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시민 전체가 전두환의 의도를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980년 4월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은 국내외에 파장을 일으켰으며, 전두환이 대권을 노린다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광주에서도 대학생, 젊은 층 중심으로 꽤 많은 사람이 전두환의 정권장악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반례로 전두환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했던 시민의 증언을 제시해보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발발 이전 증언>

다뤘던 내용들은 총학생회나 기타 공개 학생조직에서 다룰 수 없었던 경제구조나 기타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문제나 학생활동과는 좀 질적으로 다른 어떤 내용에 관한 것, 혹은 그때 당시 전두환 군부에 관한 어떤 성격규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주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명의는 기억이 잘 나지안는데, '대학의 소리'였던 것같다. 그런 내용의 유인물을 대여섯 차례 뿌렸다. 

그렇게 해서 5월 14,15, 16, 3일간 횃불대성회를 포함해서 각 대학생연합, 전남대가 중심이 된 각 대학생연합의 평화적 시위가 도청앞에서 마무리가 되고 만약에 계엄령이 확대될 경우에 그 다음 오전 10시에 각대학 정문에서 모여서 대오를 형성한 다음 도청 앞에서 집결하자는 그런 약속을 하고 16일 시위가 끝났다. 17일날은 그때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동네 친구가 휴가를 나왔기 때문에 오랜만에 동네친구들이 모여서 영종이 집인 학동 너머 2수원지 안에 있는 영종이 집에서 모여서 즐겁게 하루를 좀 쉬면서 즐겁게 보냈다. 

17일날이 토요일 이었을까, 일요일이었을까 영종이집에 모여서 앉아 있는데, 저녁 9시쯤인가 뉴스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된다는 비상뉴스가 나왔다. 그 뉴스를 보면서 나는 저러면 안될텐데 놀라면서 그 뉴스를 들었다. 또 그것을 보고 내일은 일찍 시내에 나가야 되겠네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랬는데 거기가 광주시하고 좀 떨어진 곳이어서, 버스편이 그렇게 자주 있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고 시내에 버스를 타고 나오니까 마침 10시 반쯤 되었던 것 같다. (전용호의 증언)



5월 들어 정세가 불안정했다. 물론 최규하씨가 대통령에 있을 때부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이 정국을 말아먹으려 한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이유도 현정권의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라고 들었다. 나와 친구들은 분노만으로는 절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유신정권의 잔재세력이 전두환의 군사독재를 낳을 가능성이 있는 정국의 불안함을 어떻게 해서든지 끝장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시민 한 사람에게라도 이 소식을 알리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궐기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홍재의 증언)



1980년 당시 나는 서동에서 전파사를 했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은 군사독재가 청산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기대에 들떠 있었다. 당시 '통일당' 당원이었던 나는 정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정국의 변화에도 민감했다. 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의 부상에 심상찮은 기류를 느꼈으며, 학생들의 시위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1980년 5월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학생이 참가하여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했다. 전남대 학생회장이던 박관현씨가 시위를 주도했다. 대열은 세 개 조로 나뉘었는데 각 조별로 코스를 정하여 시내를 행진한 다음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기로 했다. 내가 속한 조는 계림파출소, 서방 그리고 전남대를 거쳐 신역으로 돌았다. (김결의 증언)



 5월 16일 대학생들과 시민, 여러 교수들까지 도청 분수대에서 시국에 관한 집회를 열고 횃불시위를 했다. 전두환이가 누구인데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몰라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젊은 군인인데 대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했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날의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박석연의 증언)



이 싸움이 개학 때부터 4월말까지 계속되었다. 4월말이 되면서 외부상황이 급격이 변화하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독재 재집권 음모가 전국 대학에 알려지면서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재단문제로 인한 싸움도 당분간 보류하고 전국 대학과의 연대를 하면서 보조를 같이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조선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민투)로 그 위원이 20여 명이었다. 민투는 각 단대별 학생회 조직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조선대는 침체된 학생운동 역량을 확산시키고 대중 결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단과의 싸움을 터뜨렸던 것이다. 5월 8일 이전까지는 학내에서 시국문제에 대한 것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민투가 결성되면서부터 더 이상 학내문제로 내부 운동역량을 소모시키지 말고 앞으로 급박하게 전개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슈 전환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박태성의 증언)



그 당시 전남대에서는 집회마다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각 단대 회장의 인솔하에 소속 단과대 앞에서 '출발 도서관 앞으로' 집결하였다. 총학생회 활동의 중심은 '어용교수퇴진',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농성을 해제하고 본격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더 이상 어용교수 퇴진과 같은 자질구레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이 최대의 이슈였다. (양강섭의 증언)



<5.18 민주화운동 발발 이후 증언>

18일 오전 11시쯤 산수교회를 다녀온 후 운동화를 신고 주황색 트레이닝을 착용하고 중앙국민학교 쪽으로 걸어가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계엄이 내렸다", "전두환이가 권력을 잡으려고 그런단다"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김용완의 증언)



16일 횃불시위만 하더라도 매우 평화적이었고 시민들도 전에 없던 광경을 대하면서 '이렇게 민주화가 되는가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17일 저녁에 공수부대가 배치되자 18일 아침 구호 중에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도 있었다. 그건 일부 정치군인들이 광주를 그들 정권탈취의 제1차 명분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고, 광주시민 또한 김대중 씨가 잡혀간 사실 등을 들어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박영순의 증언)



"시민 여러분, 지금 서울에서는 김대중 씨가 전두환에게 붙잡혔습니다. 시민 여러분지금 전두환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 선생을 잡아 가두었다고 오늘 새벽 AFKN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그 학생의 말을 계기로 인원은 순식간에 일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박중렬의 증언)



가는 도중에 시위대를 실은 트럭 한 대가 오길래 아무런 생각 없이 차를 세워 올라탔다. 내가 탄 트럭은 시외곽을 돌면서 시민들을 시내로 수송하는 역할을 했다. 나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큰소리로 외쳤다. 

"공수부대가 우리 부모형제들을 학살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역행하는 전두환의 집권을 쳐부숩시다. 전두환이를 쳐부숩시다." (최지수의 증언)



양서조합에 있으니까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까. 2시가 되니까 훌라훌라 하면서 소수가 여기저기서 스크럼 짜고 여기서 저기서 모이더라고. 그래서 양서조합에 가방을 던져놓고 나는 전일방송국 앞이 모임턴데 전일방송국앞에 금남로 도청분수대 앞에서 훌라훌라하고 있는 거야. 그때 지금 희곡작가를 하고 있다는 그분도 양서조합으로 왔었어. 야 전두환이가 어쩌고저쩌고 해 가지고 대학생들을 전부다 잡아가 버리고, 난리가 법석이 나버렸다더라. 너 신문봤냐 하는데 나는 신문볼 나이가 아니요. 야 우리가 이렇게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나서서 구출해야 한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좋습니다. (김효석의 증언)



'드디어 전두환의 마각이 드러났다...... 광주 민주시민 총궐기하자......김대중씨 등 전민주인사 잡아감......' 

그사이에도 시내에서는 살벌한 상황이 계속됐던 모양이었다. 사전에 한일은행 맞은편 건물 지하의 남선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동료들에게 늦어질 것 같다고 전화를 했더니 공수부대들이 대검으로 찌르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김윤기의 증언)



내가 못 나가게 말리자 금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대학생들이 다 죽으면 어떡해요? 전두환이 대통령 되려고 한단 말이에요!" "뭣이야?전두환이 번데기공장 사장인디 뭐가 돼야?"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번데기공장 사장을 말하는 줄 알고 그렇게 말했더니, "엄마는 전두환이 번데기 사장만 있는 줄 아요? 그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면 또다시 독재정치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금희를 못 나가게 하려고, "너 하나 죽는다고 다 된다냐?"하고 버릴 성질을 냈다. (박병민, 문귀덕의 증언)



총을 매고 있는 사람도 간혹 있었고 구경 나온 사람도 무척 많아 영암터미널은 매우 혼잡했다. 광주에서 온 청년들은 차마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이 찢어 죽이자' 등의 플래카드를 붙이고 있었다. 각목으로 차체를 두드리며 노래도 불러댔다. 그들은 전두환이가 정권을 잡을려고 김대중씨를 감옥에 가두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광주시민을 수없이 죽이고 있다고 했다. (김영두의 증언)


북한군 5.18 침투설을 주장하는 임천용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나?

북한장교 출신임을 내세우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북한 특수부대(공작부대)가 침투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임천용의 인터뷰는 그때 그때 다를 정도로 일관성이 없습니다. 

5.18 북한군 침투설과 관련된 인터뷰는 네개가 존재합니다. 네 인터뷰에서 보이는 모순점을 짚어 보겠습니다.

1. 2006년 11월 한국논단 인터뷰
2. 2006년 12월 기자회견
3. 2007년 2월 뉴스한국 인터뷰 

4. 2013년 5월 TV조선 인터뷰
 

 


 

 

A. 침투 인원  

한국논단  : 우리 대대에서만 7명이 나왔다는 이야기이고 총체적으로 약 1개 대대가 내려 왔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추산하면 한 4백50명 정도로 볼 수 있지요.

기자회견 :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북한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 가량)

뉴스한국  :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600명 정도 됐을 것이다. (중략) 이 부대에서 1개 대대가 차출되어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각 특전사부대들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차출한 300명 정도는 별개로 함경남도 신포 동해안으로 마양도라는 잠수함기지에서 내려왔다. 

 

TV조선 : 5.18을 전후로 북한특수부대 1개대대 약 600명이 광주에 내려왔습니다.


B. 귀환 인원

한국논단  : 그때 광주에 내려왔다가 3분의 2는 못 돌아갔는데 그 인원이 북쪽에서 추산하기로 그게 다 죽었겠느냐 부상당했거나 합류 못했거나 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기자회견 :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


뉴스한국 : 대략 살아 돌아간 인원은 절반 정도라고 본다.
   



C. 침투, 퇴각 경로 모순점
 

한국논단 : 그때는 계엄령이 내려져서 육지는 전부 봉쇄되어있었고 그들은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지요. 그런데 광주에 그 사람들이 내려와서 절반으로 나뉘어져서 한 무리는 진압군 쪽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그리고 절반쯤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뉴스한국 : (침투할 때는) 이 부대에서 1개 대대가 차출되어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각 특전사부대들에서 준비된 사람들을 차출한 300명 정도는 별개로 함경남도 신포 동해안으로 마양도라는 잠수함기지에서 내려왔다. (퇴각할 때는) 돌아갈 때는 거의 3차에 걸쳐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큰 무리는 먼저 서해안으로 빠져나갔다. 60-70명 정도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었다. (중략) 중부전선을 넘어간 특수부대원들은 1차로 배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로 광주봉기가 끝난 뒤 육로로 빠져나간 것이 가능했다. 대략 살아 돌아간 인원은 절반 정도라고 본다. 

 

TV조선 : 제1진으로다가 선발대 들어오고, 해상으로 고깃배타고 들어와가지고 육지로 접근해서 안내원 만나가지고 그 조가 침투한 거에요. 제3조가 땅굴로 나온 사람들인데. -> 장성민의 시사탱크 233회 53분 24초

 

 

D. 시민군과 계엄군으로 나뉘어 침투했다는 황당한 주장


한국논단 : 
절반으로 나뉘어져서 한 무리는 진압군 쪽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그리고 절반쯤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뉴스한국 : 당시 김정일 정권이 정예의 북한군 특수부대요원들을 시민군과 계엄군으로 나뉘어 침투시킨 정황과 증거가 명백하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했다.

 

 

E. 정리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습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2007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습니다.

 

 2006년 한국논단의 인터뷰에서는 계엄령 중이라 육지가 봉쇄되어 북한군이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나, 2013년 TV조선 인터뷰에서는 북한군이 땅굴로 내려와서 육로로 이동하여 광주까지 내려왔다면서 자신의 예전 주장을 완전히 번복했습니다. 2007년 뉴스한국 인터뷰에서도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한 육지를 통해 북한군 60~70명이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어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침투 방법도 각각 다릅니다. 2006년에는 배로만 침투했다고 했지만, 2007년부터는 잠수함 침투를 언급했고, 특히 2013년 TV조선의 남침땅굴 특집방송 때부터 땅굴 침투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1. 2006년 10월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 2006년 12월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267072

3. 2007년 2월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4. 2013년 5월 TV조선 인터뷰 

http://vod.tv.chosun.com/vod/index_vod_detail.cstv?prog_id=C201200117&epis_sub_cnt=233 


황장엽이 북한의 5.18 개입에 대해 언급한 적이 정말 있을까?


보수논객, 일부 탈북자가 황장엽이 간첩 5만명이 있다고 증언했다는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김영삼 정부가 '고정 간첩 5만명설'을 제기한 적 없다고 시인했다는 것은 지난 포스팅에서 설명했습니다.


http://blog.naver.com/rapid81/120189436592


보수논객이 황장엽씨의 증언을 빙자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 왜곡 사례에서도 보이는데요. 

 

2013년 4월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TV조선을 통해 황장엽이 남긴 메모에 '광주학생문제는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김용삼은 해당 구절이 있는 메모를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보도에서도 그 구절을 부각시킨 사진은 없었습니다. 확실한 물증도 없으며, 제3자를 거친 전언인 이상 황장엽의 메모에서 5.18을 언급하는 구절이 정말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황장엽은 2007년 10월 15일 자유북한방송에 출연하여 김일성은 5.18에 편승하여 북한 정권에 유리하게 만들자는 의견을 거부했다고 직접 증언했습니다. 황장엽은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북한이 사전에 북한군을 투입할 계획을 세웠거나 사건 발생후 긴급하게 광주로 북한군을 보냈다면 김일성이 저런 주장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command=body&no=119


채널A에서 5.18에 개입했다는 탈북자 김명국의 주장은 모순된다.


<탈북자 김명국 증언의 결정적인 모순점> 


김명국은 1980년 5월27일 오전 9시 북한의 철수명령을 받고 광주를 빠져나가던 도중 국군과 교전이 발생하여 자신이 국군 3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는데, 1980년 5월27일 오전 6시 전남도청 등 광주시내 주요건물이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한 다음부터는 교전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 날 국군 사망자는 도청점령 도중 사망한 2명 뿐이다.



1. 북한에서는 5.18 광주사태는 북한 특전사가 개입된 사건으로 모두 알고 있다는 탈북자의 주장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2. 5월 21일 서해안의 한 지점에 상륙하여 5월 23일 광주 내부로 진입했다는 탈북자의 주장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로 전국 주요 지점에 계엄군이 배치되고 검문, 경계가 평시보다 강화됐다. 서해안의 어딘가에 상륙하여 광주까지 발각되지 않고 2일동안 육로를 통해서 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오후부터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이래로 광주는 계엄군 2만명에 의해 무등산 산책로까지 모두 포위된 상태였다. 북한군 50명이 계엄군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광주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무사히 잠입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증언에 따르면 5.18 진행 기간에는 총 한번 쏘지 않았다고 하니 실질적으로 5.18에 영향을 끼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되는데, 결국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광주에서의 행적은 전혀 없다.

 

 

3. 5월 27일 오전 9시에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 도중 교전이 발생했다는 탈북자의 주장 (결정적으로 증언에서 모순되는 부분)

 

 

 

 

그가 유일하게 광주에서 발생한 교전에 참여했다고 인정하는 사례이다. 그는 1980년 5월27일 오전 9시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하는 도중에 국군에 발각되어 교전이 발생했고, 자신은 국군 3명을 총으로 쏴서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27일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그의 증언은 국군 내부 기록과 전혀 맞지 않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실시하여 새벽 5시 20분 전남도청을, 새벽 6시 20분 YMCA 건물을 점령하고 무장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완료했다. 27일 국군 사망자는 2명이며, 새벽 6시30분 이후에는 전투 기록이 전혀 없다. 상식적으로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이 광주를 빠져나가고, 국군 여러명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증언과 모순된다.

 

 

<20사단 작전일지의 5월 27일 부분>

 

■5월27일 

◇01:00 ◎3여단: 14/66 

      ◎7여단: 39/224 

      ◎11여단: 4/34 

◇02:00-3:30 각 여대 PL*1선으로 이동 

◇04:00 3공수 여단 침투 부대 도청 인근 침투 

◇04:10 도청 총성 11발 발사 청취 

◇04:15 3공수 여단 도청에서 폭도와 접적 교전. 피해: 부상1 

◇04:23 7공수 여단 광주 공원에서 접적 치열한 교전. 사살:2 

◇04:25 61연대 전남 의대 일대에서 교전 

◇04:30 사단 각 연대 PL*1선 통과 진출 

◇04:38 11공수 여단 전일 빌딩, 관광 호텔 접적 교전 및 돌입 

◇04:40 관광 호텔, 전일 빌딩 점령 

◇04:45 전차 및 APC출동 지시  ◎전차:18대, APC:75대 

◇04:50 도청에서 3공수 여단과 폭도간 교전 치열, 3공수 여단 사단 병력 지원 요청 

◇04:51 61연대 병력 후속 증원(도청) 

◇04:53 포병 91대대 6/190명 증원 준비 및 병원 앞 진출 

◇04:55 사단 병력 PL *2선 통과 

  61연대 지역 치열한 교전(광주 공원, 도청)  피해: 부상2명 

◇05:04 11공수 여단 폭도 2명 생포(관광 호텔) 

◇05:05 전차 18대, APC 5대 도청 지역으로 출동 

◇05:06 7공수 여단 광주 공원에 교전 계속 

◎피해: 전사1, 중상4, 경상2명 

◇05:08 전차 및 APC 출동 중 병원 앞 대기 

◇05:10 61연대 2대대 광주 경찰서 진입, 점령 완료 

◇05:13 전일 빌딩 간간이 총성 

◇05:16 무장 헬기(500MD) 도청 상공 위력 시위 

◇05:18 11공수 여단 폭도 40여명과 교전, 부상:2명 

◇05:21 3공수 여단 도청 점령 완료 및 61연대와 연결 완료 

  ◎전과: 사살 2, 포로 200, 소총2,000정, 폭약 다수 

  ◎피해: 중상 1  

◇05:25 광주 시청 점령 완료(3공수 여단) 

◇05:30 60연대 책임 지역 확보 

◇05:32 61연대 도청 접수 완료 

◇05:42 7공수 여단 광주 공원 점령 및 61연대 1대대와 합류 

◇05:53 62연대 2대대 폭도 15명과 대치 교전(계림 초교) 

◇06:00 위력 수색 및 시위, 비행 복귀(AH-1J:2, 500MD:3) 

◇06:01 전차(18대0 APC(5대) 도청 도착 완료 및 전개 

◇06:02 전일 빌딩- 관광 호텔 소탕 및 61연대와 합류, 전과: 칼빈 26, 엘엠지1 

◇06:14 61연대 62연대 책임 지역 확보 

◇06:17 전투 결과 중간보고(CAC사령관) 

  전과: 사살2, 포로207 

  피해: 전사 1, 부상5 

  민간인 피해: 여자 1명부상 

◇06:20 전일 빌딩 YMCA 완전 점령 

전과: 포로 27명 

◇06:29 헬기 환자 수송 2명 

◇06:34 11공수 여단 작전 결과보고 

포로:29, 사살:3, CBN:500정, M16 총열:1, M203:1, 무전기:1, LMG:1, 탄약:4상자 

◇06:50 62연대 전투 결과보고 

사살:3, 포로:20, 방독면:1, 칼빈:3, P-77:1 

◇06:51 91포병 대대 도청 도착 61연대 증원 개시 

◇07:05 공수 여단 철수(3,7,11여단) 

◇07:25 20사단 전 임무 인수 

◇07:40 기갑 전차대 15 APC2대 1/4톤 1대 광주 시내 무력 시위 및 도청 증원 

◇08:00 부대 배치 조정, 지역 수색 및 작전 소탕 주민 통제 야간: 소대 단위 주요 지점 확보 및 기동 순찰 


■5월28일 

◇08:00 

◇12)00 중대 단위 집결지 조정 잔당 소탕 야간 기동 순찰 강화 


■5월29일 

◇04:00 광주 시내 치안 관계 경찰에 완전 인계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886

 


<전교사 작전일지의 5월 27일 부분>


5. 제 5단계: 중정 작전 수행(5.27) 


(가) 작전 개념 


*은밀 침투 기습 및 목표 동시 제압 작전 외곽 도로 및 배치선 차단 작전(봉 쇄선 형성) 특정 목표, 은밀 침투 타격 작전(도청, 공원, 관광 호텔, 전일 빌 딩)내곽에 대한 동시 공격 및 특공 부대와 연결 공격 후 주요 지점 배치 및 작전 소탕 계속적인 무기 회수 및 선무 활동 전개 


(나) 작전 경과 


·01:00 특공 부대 행동 개시 

·02:00 20사단 행동 개시 

·03:00 작전 개시 

·04:00 제31사단 행동 개시 

·04:55 최초 교전(도청, 공원) 

·05:06 광주 공원 점령 

·05:10 광주 전지역 장악 

·06:25 특공대 부대 철수 완료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892

 

 

 

4. 5월 27일 광주를 출발하여 문경세재를 거쳐 5월 30일 오후 11시 휴전선에 도착했다는 탈북자의 주장

 

 아무리 북한 특수부대가 뛰어나다고 해도 계엄령이 내려져 검문, 경계가 심한 상황에서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한반도 남쪽을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문경 세재)-강원도 순으로 돌아서 단 3일 안에 휴전선까지 간다는 것은 말이 쉽지 불가능하다.

 

 

5. 5.18에서 카빈 사망자가 69%에 이른다는 서석구의 주장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펴낸 '계엄사'를 통해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계엄사의 주장을 근거로 시위대의 69%가 카빈에 의해 사망했다는 표현으로 전환되어 극우 인사에 의해 제기됐다. 하지만 제5공화국 국방부의 계엄사는 뒷받침할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1980년 6월 초 민군 합동 조사를 통해 작성된 보안사의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의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광주시청의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가 있다. 이 중에서 카빈에 의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수는 보안사 검시 자료에서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에서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에서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는 8명이다. 5.18 사망자 검시자료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1)보안사 검시자료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2) 광주시청 검시자료 - <국가기록원 광주사태사망자철>

(3) 광주지검 검시자료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6. 4시간만에 38개 무기고 전부 털었다는 서석구의 주장

 

 19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상당수 보관하고 있었다. 전라남도의 경찰서, 파출소에 설치됐던 예비군 무기고는 적어도 269개 이상이었으며, 5.18 민주화운동 도중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38개 무기고는 전체 무기고 수에 비하면 일부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13822

 




21일 하루만에 털렸다는 주장도 사실과 맞지 않다. 5월 22일, 5월 23일에 무기가 탈취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5월 21일~5월23일, 3일간 무기고가 탈취됐다는 것이 맞다.

 

 

7. 윤기권의 월북이 의심스럽다는 서석구 주장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영국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라고 보기 어렵다. 윤기권이 5.18에서 대단한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니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여명 전부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6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7


극우세력의 주장 1. 5.18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 5.18은 1988년에 가동된「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로부터 처음「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받았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규명에 나섰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30416164800533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신군부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점차 확고해졌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9892&categoryId=200000431

 

 

극우세력의 주장 2. 5.18 최초 사망자는 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구타후유증으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5.18의 두번째 사망자는 19일 밤 10시 사망한 김안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망진단서, 사망자 검시 자료가 있다. 

 

● 5.18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은 1996년 5월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공판에서 공수부대원이 시위 진압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19일 밤 들었다고 증언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김경철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7Iv8Wfm.jpg

http://i.imgur.com/sVLaaLU.png

 

●김안부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DVO907u.png

 

 

극우세력의 주장 3.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선제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서 발포하고, 금남로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뒤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중략) 본격적으로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당시 군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했다. 5월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전두환 각하: 초병에 대해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로 올라가 조준경이 달린 소총으로 시위대 맨 앞에 주동자를 향해 조준사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6007

 

 

극우세력의 주장 4. 5.18 당시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 5.18에서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이다. KM900은 궤도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 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당시 버스기사, 트럭기사도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시민의 KM900 조종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극우세력의 주장 5. 5.18에서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다고 하던데?

 

●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두 도로의 옆에 바로 붙어있어 통행이 빈번한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제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도로를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주변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무장여부와 관계없이 통행하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했다. 따라서 시민은 도로통과는 물론 접근조차 제대로 못했다. 이런 상황을 군 측은 '교도소 습격'이라고 왜곡했던 것이다.

 

http://i.imgur.com/3TYpVaK.jpg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 한도희의 증언)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900329101009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12.12 5.17 5.18 보고서 100쪽>

 

 

극우세력의 주장 6. 어떻게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 38개를 모조리 털어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19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상당수 보관하고 있었다. 전라남도의 경찰서, 파출소에 설치됐던 예비군 무기고는 적어도 269개 이상이었으며, 5.18 민주화운동 도중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38개 무기고는 전체 무기고 수에 비하면 일부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13822

 

 

극우세력의 주장 7. 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펴낸 '계엄사'를 통해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계엄사'에 실린 이 내용은 총격에 의한 사망자 69%가 카빈에 맞아 사망했다는 표현으로 전환돼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계엄사'는 뒷받침할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1980년 6월 초 민군 합동 조사를 통해 작성된 보안사의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의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광주시청의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가 있다. 이 중에서 카빈에 의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수는 보안사 검시 자료에서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에서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에서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는 8명이다. 5.18 사망자 검시자료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1)보안사 검시자료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2) 광주시청 검시자료 - <국가기록원 광주사태사망자철>

(3) 광주지검 검시자료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극우세력의 주장 8. 5.18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12구이며, 신원미상 시신이 의심스럽다? 

 

● 2001년 광주광역시에서 실종자, 장기 가출자, 행방불명자 가족 282명의 유전자 대조작업을 벌여 신원미상 시신 11구 중에 6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권호영(당시 16세)·김기운(17세)·김남석(18세)·김준동(16세)·양민석(20세)·최숙일(21세)씨 등 6명의 시신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 나머지 5구의 시신 중에서도 40세 가량의 남자, 4세 가량의 남자아이, 목포에서 비무장 상태로 차량 위에서 시위하다 추락해서 사망한 남성 등 적어도 3구는 불순세력과 연관짓기 어렵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2524021


http://i.imgur.com/cIM7D4E.png (40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2U0atGT.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 사망자, 실종자가 수백명이 되는 대형참사에서 모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30구,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6구인채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5.18 민주화운동의 신원미상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전혀 많은 편이 아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204080211729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21103031007344

 

극우세력의 주장 9.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는 근거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이 월북했다고 왜곡하기도 함)

 

●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영국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 

 

●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라고 보기 어렵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여명 전부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6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7

 

 

극우세력의 주장 10.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 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20650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3274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8039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5622

 

●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극우세력의 주장 11.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했다는 임천용의 증언은 북한군의 침투인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http://i.imgur.com/5c7Kyt0.png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7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참고: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임천용은 2006년 한국논단의 인터뷰에서는 계엄령 중이라 육지가 봉쇄되어 북한군이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나, 2013년 TV조선 인터뷰에서는 북한군이 땅굴로 내려와서 육로로 이동하여 광주까지 내려왔다면서 자신의 예전 주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2007년 뉴스한국 인터뷰에서도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한 육지를 통해 북한군 60~70명이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어갔다고 말한 바 있다.

 

 침투 방법도 각각 다르다. 2006년에는 배로만 침투했다고 했지만, 2007년부터는 잠수함 침투를 언급했고, 특히 2013년 TV조선의 남침땅굴 특집방송 때부터 땅굴 침투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1)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3)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4)TV조선 인터뷰

http://vod.tv.chosun.com/vod/index_vod_detail.cstv?prog_id=C201200117&epis_sub_cnt=233 

 

● 2006년 임천용이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한 사망자의 시체 사진을 제시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총에 맞아 쓰러진 외삼촌 손광식을 구하러 갔다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사망한 임정식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125614



극우세력의 주장 12.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당시 상황을 TV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주장하는데, 1980년 당시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5.18 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에 맞아 사망했다.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몇몇 탈북자는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면서 한 시신의 사진을 제시했는데, 5.18 사망자 검시자료에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가지고 왜곡한 것이다.

 

 

극우세력의 주장 13. 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사관장 계급으로 복무했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며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며 “주목을 끌고 싶은 일부 인사가 잘못된 발언을 해 광주 시민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강조했다.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로 복무한 한 탈북자는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며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재향군인협회는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극우세력의 주장 14.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인민군영웅 렬사묘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 어떤 사건의 사망자를 추모하는 비석인지 불분명하고, 5.18과 비석의 관련성을 입증한다는 문건의 존재도 불확실하다. 이 뉴데일리 기사는 북한 비석 사진과 김주호의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시킬 뿐, 북한과 관련성을 입증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국정원 역시 이 비석과 5.18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보원을 통해 현장조사를 했지만 묘비 속 이름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 지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특수부대원의 이름을 나열하고 특수임무를 공개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7&aid=0002025328



극우세력의 주장 15. 황장엽이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쓴 메모가 있다?

 

● 2013년 4월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TV조선을 통해 황장엽이 남긴 메모에 '광주학생문제는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삼은 해당 구절이 있는 메모를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보도에서도 그 구절을 부각시킨 사진은 없었다. 확실한 물증도 없으며, 제3자를 거친 전언인 이상 황장엽의 메모에서 5.18을 언급하는 구절이 정말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 황장엽은 2007년 10월 15일 북한으로 송출된 자유북한방송의 방송에서 김일성은 5.18에 편승하여 북한 정권에 유리하게 만들자는 의견을 거부했다고 직접 증언했다. 황장엽은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북한이 사전에 북한군을 투입할 계획을 세웠거나 사건 발생후 긴급하게 광주로 북한군을 보냈다면 김일성이 저런 식의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page=4&command=body&no=119

 


극우세력의 주장 16. 북한군 사망자가 수백명 단위이다? 


● 임천용은 2006년 인터뷰에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해서 3분의 1이 귀환했고, 2008년 인터뷰에서 북한군 600명이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주장했다. 임천용의 주장에 따르면 5.18에서 북한군 300여명이 사망했다는 말이 된다. 뉴데일리 기사의 김주호는 북한군 사망자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 신군부가 5.18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군과 대규모 교전사실 및 북한군 사망자를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명 단위의 북한군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은 매우 떨어진다. 


(1) 5.18 민주화운동에서 상점가, 은행 약탈이 단 한건도 없었다는 기사



 

 

1980년 5월 29일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신군부가 기사 한줄까지도 모조리 검열하던 시절인데도, 5.18 당시 약탈이 없다는 기사가 검열을 통과했습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2900209207001

 

(기사 본문)

 

 

금요회회장 이국식 한국은행 광주지점장은 "최근 사태로 제일은행, 상업은행 등 16개 점포의 유리창과 건물 일부가 파손돼 재산피해를 입었으나 금융기관은 안전했다"고 말했다.

 

계엄군 진입 사흘째를 맞은 29일 광주시내 중심가 금남로, 충장로 등의 모든 상가는 완전히 문을 열고 상품을 진열, 정상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중심가 상인들은 몇몇 점포의 진열장 유리만 깨졌을 뿐 피해품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각종 휘장을 파는 제일인업자 주인 위종환씨(43)는 "깨진 유리창은 20일 충장파출소 순경들이 피신할 때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시내 백화점은 대부분 29일 개점준비를 서둘러 30일부터 문을 열 예정이다.

 

광주관광호텔 뒤 삼양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임대업주들에게 연락 중이며 30일부터 개점하겠다"고 밝히고 "광주시내 백화점들이 5.18사태로 약탈당하거나 피해본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 5.18 항쟁기 계엄군 실탄 사용 현황


 

소화기 497,492

권총 2,754

기관총 10,759

수류탄 194

40M 유탄 60

90M 무반동총 8

기타 889

계 512,626

 

출처 : 노영기, 5.18항쟁기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진혼곡



3) 5.18 진압에서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의 핵심 역할 시사 문건



<광주사태시 각종조치 및 결심에 이르기까지는 국방장관,  해공군총장, 연합사부사령관, 보안사령관(전두환), 수경사령관 들과 수 차의 회의를 통하여 충분한 사태 및 상황분석과 가용방책등을 진지하게 검토했음>이라고 적혀있는 군사자료.

출처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ㆍ12, 5ㆍ17, 5ㆍ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관련 기사)

당시 육군총장 비서실에서 작성한 '증언 참고자료'(기무사 보존)에도 5.18과 관련한 각종 사항을 결정하는데 '장관, 합참의장(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백석주), 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들과 수차례 회의를 통해 충분한 사태 및 상황분석과 가용방책 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라고 기록돼 전 보안사령관이 핵심역할을 했음을 시사했다. 



(4) 국회를 군병력으로 봉쇄하여 국회를 해산시킨 신군부

(1) 국회의원의 국회 출입을 저지하는 계엄군

 

(2) 국회의원과 취재진의 출입을 봉쇄하는 계엄군


 

(3) 국회의사당 앞에 배치된 계엄군

 

신군부는 1980년 5월20일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비상계엄령의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켰다.  


(5) 5.18 민주화운동에서 카빈을 든 계엄군


첨부파일 (2)

 

 

5.18 민주화운동에서 일반적으로 계엄군은 M16, 시위대는 카빈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카빈을 든 계엄군도 있었습니다.


(6) 12.12 5.18 재판, 5.18 특별법을 둘러싼 법적 논란 정리


1. 5.18 사건의 공소시효

 

서울지법, 서울고법, 대법원 모두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선포부터 1981년 1월24일 해제시까지 비상계엄이 지속되면서, 신군부가 군을 동원한 정치탄압에 의해 정상적인 국정활동이 마비되었던 기간에는 내란행위가 진행중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공소시효 기산점은 1981년 1월24일이며, 공소시효 만료점은 1996년 1월23일이다.

 

2. 5.18 특별법 적용 대상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전혀 적용받지 않았다. 5.18 사건 관련자 역시 5.18 특별법과 무관하게 공소시효 안에 기소됐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제외한 12.12 사건 관련자에 대해서만 5.18 특별법이 적용됐다.

5.18 사건의 경우, 검찰은 5.18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이 1981년 1월 24일, 만료일이 1996년 1월 23일이라고 판단했다.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되기 하루 전 5.18 사건과 관련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 8명을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로 기소했다. 1월 23일 12.12 5.18 사건 수사본부는 "공소시효 문제와 관련해서는 5.18특별법과는 전혀 무관하다"며 "5.18관련 내란의 경우 특별법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시효가 남아있다고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정호용, 허화평, 허삼수는 1996년 2월 8일 내란죄로 기소됐지만 형사소송법 제253조에 따라 공소가 제기되면 시효가 정지되고, 공범에도 시효정지가 적용되기 때문에 공소시효 안에 기소됐다고 볼 수 있다 .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헌법 제84조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는 12.12 사건과 관련된 반란죄 혐의의 공소시효는 재임기간 정지됐다 .(94헌마246)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 외 12.12 관련자는 1994년 12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전두환, 노태우 외 12.12 관련자는 1996년 2월 28일 5.18 특별법 제2조의 공소시효 연장 규정이 적용되어 기소됐다.


3. 5.18 특별법에 대한 쟁점 정리

1995년 12월 22일 국회의 5.18 특별법 입법 이후 장세동, 최세창은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했으며, 유학성 외 5인은 헌법소원을 냈다. 1996년 2월 16일 헌법재판소 재판부는 5.18 특별법은 소급입법이 아니며, 형벌불소급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고, 부진정소급효를 갖는 경우 합헌이라고 판시했다. 부진정소급효를 갖는 경우 진정소급효를 갖는다 해도 공익적 필요가 크면 합헌이라는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 4인 의견과, 법원이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한다면 한정위헌이라는 헌법재판관 5인 의견으로 나뉘었지만 합헌 판결이 내려졌다.(96헌가2)

한정위헌이란 법률이나 법률 조항의 전부, 혹은 일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하지 않고 특정한 해석기준을 제시하면서 위헌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법원이 5.18 특별법 입법 시점에 12.12 사건, 5.18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한다면 위헌이다. 헌법재판소가 5.18 특별법에 대해 한정위헌판결을 내렸다면 공소시효가 1년 가량 지난 12.12 사건은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5.18 사건은 국회의 입법 당시에도 공소시효가 종료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4. 성공한 군사반란, 내란(쿠데타)을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
 
1997년 4월14일 대법원은 "신군부가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면서 성공한 군사반란, 내란(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우리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피고인들이 공소사실과 같이 이 사건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피고인들이 이 사건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96도3376)
 

5. 12.12 5.18 재판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했는지 여부
 
대한민국 헌법 13조 1항은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고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는 1997년 4월14일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단 한번만 처벌됐다. 신군부 인사는 1997년 4월 14일 대법원 판결 이전 혹은 이후에 12.12 사건, 5.18 사건과 관련된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12.12 5.18 재판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았다.
 
지만원은 정승화 판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재심 절차를 밞지 않은 상태에서 12.12, 5.18 사건에 대해 판결했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다고 주장하지만 피고인이 정승화인 사건, 피고인이 김대중인 사건과 피고인이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인 사건은 법적으로 전혀 별개이다.

 
6. 12.12 5.18 재판은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했는지 여부

12.12 사건, 5.18 사건과 관련하여 신군부 인사에게 적용된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 등의 죄목은 1979~1981년에도 존재했므로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았다. 국회가 5.18 특별법을 입법하면서 새로운 죄목을 만들어서 12.12 5.18 재판에 적용한 것도 아니다. 5.18 특별법, 12.12 5.18 재판은 형벌불소급의 원칙과 무관하다. 


7. 12.12 5.18 사건 판결문은 헌법을 부정하고 자연법을 따랐는지 여부
 
지만원은 2심 판결문에서 "제 법률 위에 헌법이 있고 헌법 위에 자연법이 있다"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면서 자연법은 곧 사회인식법이며, 헌법을 부정했기 때문에 12.12 5.18 사건 재판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단 지만원이 언급한 2심 판결문의 구절은 대법원 판결문에는 반영이 되지 않았다. 
 
신군부 인사는 성공한 쿠테타는 새로운 법질서를 형성하기 때문에 기존의 법질서에 따라 처벌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재판부는 이런 신군부 인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 자연법, 혁명, 쿠데타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2심 재판부는 "어떤 국가의 헌법 내지 기본적 법질서가 자연법에 어긋나는 부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 사회에 팽배하여 마침내 그 불일치를 힘에 의하여 극복하려는 급격한 투쟁을 혁명"이라고, "쿠데타는 그로 인한 변화가 사회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지도자가 교체되는 것에 그친다""고 규정했다. 이어 2심 재판부는 신군부의 행위는 쿠데타에 해당되며, "쿠데타가 성공하여도 기존의 헌법과 이에 기초한 법률은 효력을 상실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이와 같이 계속 효력을 유지하는 기존의 법질서를 근거로 하여 처벌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96노1892)
 
지만원의 주장과 달리 신군부 인사가 기존의 헌법, 법질서를 부정했고, 2심 재판부가 기존의 헌법, 법질서를 옹호했다. 2심 재판부는 신군부 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과정에서 '자연법'이라는 용어를 꺼냈을 뿐, 신군부의 쿠데타 행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법질서를 형성하지 않는다면서 기존의 헌법, 법질서에 따라 신군부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참고)

5 ∙ 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2조 위헌제청 판결문(96헌가2) 정리

1. 5.18 특별법은 소급입법인지 여부.

헌법재판관 4인의 의견 
 
공소시효제도는 헌법이 마련하고 있는 제도가 아니라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제도이므로, 기본적으로 법원의 전속적인 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며, 헌법재판소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헌법재판관 3인의 의견 

특별법 제2조는 법 및 법집행의 왜곡에 따르는 소추의 장애사유가 존재하여 헌정질서파괴 행위자들에 대한 검찰의 소추권행사가 불가능하였으므로 당연히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법리를 확인하여 입법한 데 불과하므로 소급입법에 해당하지 않는다.
 
헌법재판관 2인의 의견 
 
공소시효는 법률로써 명문규정을 둔 경우에 한하여 정지되는 것이고, 헌법 제84조의 규정도 공소시효의 정지에 관한 명문규정으로 볼 수 없으므로, 위 법률조항에서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것으로 규정한 전기간, 모든 피의자에 대하여 이 법률조항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법률조항은 소급적 효력을 가진 형성적 법률이다.
 
 
2. 5.18 특별법은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했는지 여부.
 
헌법재판관 전원일치 의견

형벌불소급의 원칙은 “행위의 가벌성” 즉 형사소추가 “언제부터 어떠한 조건하에서” 가능한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 “얼마동안” 가능한가의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니므로, 과거에 이미 행한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 사유만으로 헌법 제12조 제1항 및 제13조 제1항에 규정한 죄형법정주의의 파생원칙인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언제나 위배되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공소시효에 관한 규정은 원칙적으로 헌법 제12조 제1항 및 제13조 제1항의 효력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3 5.18 특별법이 부진정소급효를 갖는 경우 법치주의의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
 
헌법재판관 전원일치 의견 
 
공소시효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경우 위 법률조항은 단지 진행중인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법률로서 이른바 부진정소급효를 갖게 되나, 공소시효제도에 근거한 개인의 신뢰와 공시시효의 연장을 통하여 달성하려는 공익을 비교형량하여 공익이 개인의 신뢰보호이익에 우선하는 경우에는 소급효를 갖는 법률도 헌법상 정당화될 수 있다.
 

4. 5.18 특별법이 진정소급효를 갖는 경우 법치주의의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
 
헌법재판관 4인의 합헌 의견
 
진정소급입법이라 하더라도 기존의 법을 변경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심히 중대한 반면에 그 법적 지위에 대한 개인의 신뢰를 보호하여야 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어 개인의 신뢰이익을 관철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헌법재판관 5인의 한정위헌 의견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된 경우에 그 뒤 다시 소추할 수 있도록 법률로써 규정하는 것은 위헌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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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병 솔직히인기남12년 전 | 신고

    혹시 폭력시위이므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할 거라면 내가 4.19때 벌어진 일들을 정리해줌

    1. 군용 트럭 점거

    2. 군용 탱크 점거

    3. 경찰서 방화

    4. 소방차 방화

    5. 국회의장 자택 집기 소각

    6. 자유당 사무실 침입

    7. 무기고 습격으로 총기 및 수류탄 탈취

    8. 그 총기로 경찰과 총격전

    9. 수류탄을 경찰서장실에 투척

    베스트 댓글
  • 이병 Toureyaya12년 전 | 신고

    광주군인이 광주시민 죽였다합니다 글내려주시죠 베스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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