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enable JavaScript in your browser to load website properly.

Click here if you'd like to learn how.

[역사 총정리]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폭동이다! [23]

이병 나드돈아니다 | 13-10-21 23:07:44 | 조회 : 1196 | 추천 : +5


5.18 날 전남대 정문을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음.

 

 계엄군은 각 지역별로 할당되어 각 대학교를 지키고 있었고, 계엄령 때문에 휴교령이 발동된 상황임.

 

 

 그 때, 학생들이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했음.

 

  계엄군은 당연히 막아야 할 것 아니냐? 휴교령인데 학교를 가게 냅두냐?

 

 

 학생들과 충돌이 발생하고, 학생들은 꽤 모여서 계엄 해제하라고 농성을 폄.

 

 여기까지는 민주화운동이라고 볼 여지가 있음.

 

 

 여기서 학생들을 해산시키려고 하면서 진압봉을 쓰게되고, 학생들은 도망다니면서 돌을 던지며 해산시키려는 계엄군과 맞서 싸움.

 

 

 돌에 맞아 계엄군이 7명이 피를 흘리며 부상당함.

 

 

 이게 5.18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계엄군이 그렇게 잘못한 거냐?  계엄군은 바둑판하고, 배구공 준비해서 출발했는데..? 학생들 패고 싶어서 간것도 아니고......

 

 

 

 이 사건 이후로 학생들은 광주시내 전역의 파출소,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방화하고, 경찰 45명을 인질로 삼고, 투석전을 벌이는 식으로 완전 개망나니짓을 다 함.

 

 학생들은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이 죽었다는 유언비어에 속아, 분풀이로 이렇게 하며 돌아다님.

 

 

 경찰서란 경찰서가 방화되고, 경찰이 인질로 붙잡힌 상황에서 경찰서장은 계엄군에 진압을 요청하고,  정웅 31사단장이 군인을 출동시켜 해산시키려고 함.

 

 

 이 과정에서 학생들을 존나 패고, 옷을 벗기는 등의 과격 진압이 있었고, 이건 계엄군이 잘못한 거라 볼수도 있음.

 

 

 계엄군이 잘못한게 있긴 하지만, 시위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죽이러 왔다는 등의 지역감정이랑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느니 젖가슴을 잘랐다느니 하는 유언비어로 인해.....

 

 19일, 20일이 되자 시위는 과격양상으로 치달아 무인차량공격, 유인 차량공격으로 이어져 11톤 트럭에 공수 1명이 깔려 죽었음.  경찰 4명도 버스에 깔려 죽음.

 

 

 내가 광주 사람한테 물어 볼게.

 

 지역감정, 임산부 죽었다 등 유언비어 때문에 화나서 시위가 격화됐냐 아니면, 계엄해제하는 시위를 진압봉으로 해산시키려는 것에 화나서 시위가 격화됐냐?

 

 

 진압봉 몇대 맞았다고,,,, 광주 시내 경찰서란 경찰서는 모두 방화하고 다니는게 적절한 대응이었냐?

 

 

 20일에 칼빈 사망자 2명이 발생한 것만 봐도, 총기 탈취는 18일 경찰서 습격하면서 조금씩 이뤄지고 있었던 걸로 보이고, 21일 총기 탈취가 한꺼번에 이뤄지고, 그 날 도청에 없었던 사람들도...... 총기 탈취를 하러 가거든.

 

 도청에 없었던 사람들이 총기 탈취를 하는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래?

 

 

 18,19일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으로 인해, 김경철이 맞아 죽었다고 하던데..... 사인을 분석하면 오히려 교통사고에 가깝다는게 합리적 분석일 수 있는데.....

 

 

 

 21일 도청앞 사건도..... 시위대가 계엄군을 장갑차로 1명 깔아 죽인 뒤에..... 다가오는 버스를 향에 방어차원에서 난사한게 그 시작이야.

 

 계엄군이 가만 있는 시위대 건드린 것도 아니고...

 

 

 시위대가 계엄군을 계속 자극하고, 건드리고 있었던건데...... 도청에서 물러나라고 하고, 경찰서도 없애고, 방송국도 없애면, 광주시가 뭐가 되냐?

 

 그냥 광주 독립 운동 하냐?

 

 왜 도청을 함락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봐야지.....

 

 

 평화적으로 하면 되는걸 왜 게엄군을 장갑차로 깔아 죽이고,

 

 예비군 무기고 집단적으로 털어서 무장을 하냐고?

 

 그날 무장만 안했어도, 광주 시민 100명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는데.....

 

 

 무장한 시위대를 그냥 놔둘 수가 있냐? 진압할 수밖에 없는 거고.....

 

 

 5.18에 대해서는 진짜 공부하면 할수록,  시위대가 유언비어에 속아서 과격하게 행동했다는 게 보일거다.

 

 5.18 수기 보면, 유언비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말해주는 구절이 많으니까.....

 

 

 경상도 차량이라는 이유로 방화하고, 그 운전자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수기도 있는데.....  (죽였다는 말도 있지만, 증거가 부족한 거 같아서 )

 

 

 암튼 이게 민주화 운동이라니.... 어이가 없는 거지.

 

 

 미성년자한테 총기 나눠주고, 총기 오발사고 일으키고...... 마지막날에 도청 사수하던 사람 중에 미성년자도 꽤 있는 걸 보면...

 

 어린 애들을 유언비어로 속여서...... 죽음으로 이끌고......

 

 

 미친 짓을 했지.

 


[편집인 주: 이 기사를 '다음'에 기사로 송고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중 송고 시에 법적 문제 발생될 수 있습니다]


 

시민군한테 무전기는 왜 필요하당가?


내가 아래의 글을 보고 주목한 것은 광주에 침투했었다는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라고 밝힌 탈북여성의 증언이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그녀의 증언내용의 신빙성을 나름대로 따져볼 수 있는 검증키워드를 나는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증언내용은 서울 소재 대학가 운동권 지하조직과 연관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증언을 통하여 학창시절 운동권에 대하여 늘상 품었던 의문을 풀 수 있는 확고한 단서를 찾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제서야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증언은 그만큼 신빙성이 큰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탈북자의 증언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숨겨진 이면을 밝히는데 얼마나 긴요한 것인가를 몸소 깨닫고 나는 전율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때로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전남 38개 무기고 무기 탈취를 총지휘하였던 북한군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였던 한 탈북여성은 전라도에 지하조직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 함경남도고등중학교 교원 2009, 72쪽).

그 지하조직들 중 전라도 여러 무기고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조직이 <전남민청협>이었으며, <전남민청협>의 위장명칭이 <현대문화연구소>였다. 위장명칭 <현대문화연구소>는 합법적으로 사무실 공간을 사용하기 위한 명칭이었으며, 실제 지하활동을 위해서는 <전남민청협>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남파공작원들이<전남민청협>의 협조를 얻어 무기고 위치를 사전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설프게 전경 복장을 한 정체가 수상한 시민군이 시민군 트럭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전 함경남도고등중학교 교원 2009, 69-70).

1980년 3~4월에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무기고들의 위치를 사전에 확보해 놓은 조직이 있었다. 더욱이, 한 탈북자에 따르면 파악된 무기고 위치가 군사작전지도에 표시된 무기 배치도가 작성되었으며, 시민군으로 위장한 자들은 그 무기고 배치도에 근거하여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사전에 정찰해 두었던 전라도 지역의 무기고 배치도에 근거해서 그들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시민군이라고 위장한 자들이 조직적으로 먼저 병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전 문천제력소 노동자 2009, 272). 탈북자들의 이런 증언은 광주사태를 총기획한 윤한봉이 증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전남민청협>이 군사작전지도용으로 쓰이던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구해 무기고들의 위치를 표시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5.18광주시민군
5.18 광주시민군이 광주 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고 있다.


성님들...... 선량한 시민이 복면을 차고댕긴당께요!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인자, 요즘은 지도가 아주 세밀한 지도까지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살 때. 단파 라디오 사는 것하고 비슷해가지고. 그 지도를 인제 박화강씨, 그때 광주매일인가 있었는데 지금 한겨례 지국장 하다가 그만 뒀는데. 그 화강이 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내가 만오천분지일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총, 다이너마이트 이런 무기들이 필요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가 있고 이,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구나 이런 것들 좀 파악하고 도청을 어떻게 점거하기 위해서 도청 주변의 도로를 어떻게 어디 쪽으로 몰려들고 포위를 해야 하고 등등 고런 작전도 세우고 좀 그래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지도를 구한 거예요. 지도를 구해가지고 이를테면 지원동, 지금은 소태동 쪽인데 거기 나가다보면 거기 채석장이 있었어요. 다이너마이트 창고도 있고. 현장 답사도 하고. 양림동 파출소 뒤에 있는 무기고부터.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다니면서 ……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1-4 http://trollwall.egloos.com/4237830).

 

5.18광주시민군
5.18 광주시민군이 광주 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고 있다.

이렇듯 무기배치도에 관하여 탈북자들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하는 증언을 하는 윤한봉이 바로 1989년 8월 문규현 신부를 시켜 임수경을 방북을 도와 평양축전에 참석시킨 장본인이었다 (한겨레 2008년 6월 27일자).

조갑제 기자가 광주사태는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할 때 그의 그런 주장의 유일한 구호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한봉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자기가 만들어낸 위장구호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왜그냐면 인제 내가 쩐남대 선언문을 썼는데 거기에 어떤 대목이 나오냐면은 그때만 해도 인제 가능하면 들어가서 빨갱으로 안 몰리기 위해서 일부로 북을 좀 까는 내용들이 한줄씩 들어가고 그랬다고, 518직전에도 뭐 이 전남대 시위때도, 북괴는 오판말라 이런 피켓도 들고 그랬는데, 근데 그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대목들이 들어간다고 (윤한봉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 1차 2-7 http://trollwall.egloos.com/4236007).

이 증언 1-2에서 윤한봉은 자기를 비롯한 광주운동권은 통혁당의 청소년 조직 광랑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1960년 후반에 통혁당의 공산주의 혁명 전략은 무장봉기였으며, 청소년 시절 그 이데올로기 영향을 광주운동권이 광주사태라고 불리는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윤한봉이 지어낸 위장구호 ‘김일성은 오판 말라’가 실제로 광주사태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윤한봉의 동지 윤상원의 영어 통역이었던 인요한이 그 구호에 낚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교사 자녀로서 어렸을 때 광주의 친구들과 함께 자랐던 인요한은 광주사태 때 아직 대학 진학을 못한 청소년이었으며 그래서 분별력이 모자라 쉽게 낚였다. 지난 5월 16일에 인요한이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아침에 반공구호를 외치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었는가? 도청 접수 후 윤상원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동지들이 그의 반미 발톱을 그렇게 너무 서둘러 드러내면 광주시민들의 협조를 얻기 어렵다고 말리며 설득하여 반미 구호를 갑자기 반공 구호로 바꾼 것이었다. 반공 구호는 위장구호요, 본래 목적은 반미였기에 지금도 각종 5.18 행사에서 반미 구호들이 외쳐진다. 유네스코에 5.18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한번 읽어보라. 그 어디에도 반공 이념의 흔적은 없고 오로지 반미 이념으로 가득 찬 성명서들뿐이다.

인요한은 아직 청소년이어서 분별력이 부족했기에 낚였던 것이겠지만 당시 윤한봉 동년배였던 조갑제 기자도 그 위장구호에 낚이셨는가? 위장 구호가 반공 구호라는 논리라면 그 위장 구호를 만들어 낸 윤한봉은 반공 투사라는 논리가 된다. 청소년 시절 통혁당 이념의 영향을 받아 광주운동권이 된 자가 반공 투사였는가? 미국 망명시 북한 당국과 공동으로 평양축전을 추진하던 윤한봉이 불법으로 임수경 양을 방북시켰던 것이 반공 행위였는가? 오늘의 임수경은 윤한봉이 문규현 신부를 시켜 그녀의 방북을 도와 평양축전에 참석시켰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 누가 그녀를 가리켜 반공투사라고 말하는가? 윤한봉 본인도 자신의 입장은 반공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오히려 그는 반공 이념과 투쟁하던 자였다.

그렇다면 윤한봉이 반공이념과 투쟁할 목적으로 전략상 지어낸 위장구호가 진실된 반공구호일 수 있었겠는가? 만약 광주사태는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의 근거가 단지 윤한봉이 종종 쓰던 위장수법의 하나로써 지어낸 구호뿐이라면 실제로는 광주사태가 반공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__________

* 윗글에서 인용된 참고문헌들 윤한봉의 구술녹취문은 괄호에 링크가 있고 그 외의 문헌은 “역사로서의 5.18” 제4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사출처: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7594

 

조갑제의 주장에 대한 반론
http://cafe.daum.net/issue21/3IBb/774

5.18 당시 상황에 대한 땅끄의 증언

http://www.study21.org/518/document/president_reply.htm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속속들이 나오고 있는 추세인데,


니들 그거 아냐.



북한의 개입을 인정하면, 오히려 폭동이 아니게 된다.



근거는 일단 폭동이라는 것의 정의에서 비롯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58578&categoryId=200000215


여기서 보면 폭동은 


"조직되지 않은 인간집단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력에 의해 소동을 일으키는 일.

[출처] 폭동 | 두산백과"


그런데 북한이 개입했을 경우?


"인위적으로 조직된 집단이 인공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되어버려서, 오히려 폭동이 아닌 다른 것으로 불려야 한다. 이 경우
국가전복시도 내지는 반란 이라는 말이 더욱 적절하겠지.



그리고 북한의 개입은 아직 팩트라고 주장하기엔 시기상조이다. 


우리가 근거로 삼는거는 죄다 탈북자의 "카더라"에 의지하는게 사실. 탈북자가 군대 이빨 까면서 광주 왔다갔다고 주장하는건지, 아니면  실제로 파견되었는데 기록이 파기된건지, 거기에 대해 우리가 근거로 삼을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즉, 심증은 확실히 있는데 물증이 없어서 팩트라고 들이밀다간 병신소리 듣기 딱 좋은거야. 


같은 이유로 조갑제 기자도 북한 개입설에는 좀 부정적이다.


링크 참조.





하지만 세상이 두쪽나고 김대중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있더라도



광주는 폭동이 맞다.



왜인지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폭동이라는 말의 정의를 위에서 인용했지.


폭동의 가장 큰 요소는 폭력 소동이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서 총기를 탈취하는등 폭력을 동원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에 의해 일어난 소동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일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할수밖에 없다.



솔직히 여기 우좀 새끼들이나, 광주 개새끼들이나, 폭동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게 있어서 이렇게 싸움이 나는거다.


무조건 "폭동은 나쁜거잖아여!!!" 이 지랄하고 귓구녕에 홍어 쳐박고 있으니 뭐가 들어오는게 있나.



아주 많이 양보해줘서 광주가 민주화 운동이 맞다고 치자.




그래도 민주화 운동폭동양립할수 있다.


근거는? 





여기에 뭐가 있게?




그리고 같은 리스트에 프랑스 혁명, 미국 혁명과 관련된 사건은 왜 폭동(Riot)으로 분류될까?


이는 폭동이라는 단어가 가치 중립적인 단어라는걸 다시 한번 뒷받침한다.


위키백과가 공신력있는 소스는 아닌거 안다.


근데 위키백과는 또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지.


미국애들이 호구라서 저거 남겨놨을까? 프랑스 애들이 호구라서 저걸 남겨놨을까?




그리고 폭동의 경우 해당하는 죄는 형법 115조의 소요죄.

그런데 북한이 개입했을 경우에 해당하는 죄는 여적죄.


분명히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광주를 민주화로 규정짓는 사람들도, 폭동이라는것은 인정해야 광주의 정당성이 인정이 된다.


폭동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헌정 질서가 흐트러져있었다는것을 인정해야 하는거지.



하아아안참 양보해서 예를 들어서 강도와 싸우다 강도를 죽였지만 정당방위 참작이 된 사람이 있다고 쳐 보자.

근데 이 사람이 몇년 후에 나 사람 안죽였어 시발년아 라고 주장을 해. 

그러면 당시 사건이, 굳이 사람 죽일 일이 아닐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었네, 하는 해석이 나오는거지.


마찬가지로 민주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폭동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을수가 없다는거다.

폭동이 아니라고? 그러면 그만큼 민주화가 급하지 않았다는걸 스스로 주장하는 꼴이 되니까.



결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의도가 민주화일수도 있고 반란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형태는 폭동이라는거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http://tinyurl.com/ahnn2zu 참고

알다 시피 이명박 정부 초기 100일간 서울을 뒤흔들었던 ``광우병 촛불난동 사건`` 광우사태를 기억할것이다

이 광우 사태는 1980년에 있었던 ``광주사태``와 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긴글일수도 있겟지만 읽어보면 좋겟다

광주사태는 잘몰라도 광우병 촛불난동은 잘알고 있지 않노?? 이둘을 비교해보면

명백한 폭동이라는게 내 결론이다


1번째 : 헌법에 의하여 합법적인 정권이 최규하,이명박 대통령을 끌어 내리고 정권타도가 목표였음


광주사태 : 헌법에 의하여 합법적인 정권인 최규하를 끓어내리려고함 그들의 구호는 최규하 물러나라 전두환 물러가라


시간이 없는게이들은 빨간색 줄쳐진것만 봐도 좋다





4.jpg



개 같은 최규하와 신현확 총리를 적으로 간주+ 전두환 알파



new_7.jpg



그렇다 광주사태의 외침은 최규하대통령+신현확내각 총사퇴+전두환을 몰아내는거 였다

다음 사진은 모두 몰아내고 자신들이 세우고 싶어 하는 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목표가 들어가있다



광주사태3.png



그러면 광우사태는 어떠한가??



광우사태1.png광우사태2.png



ㅇㅇ 마찬가지로 헌법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국민투표로 당선된 이명박 물러가라

이명박 탄핵해야 된다는 구호를 외치며 청와대 진격을 시도한다



광우사태 청와대.png


청와대로 진격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정권을 탈환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는것이다


2번째 : 불법폭력시위

광주사태 1.png광우사태3.png


이둘의 공통점은 본인들의 민주화 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폭력을 동원하며

수많은 경찰+군인(광주사태),광우사태-경찰 피해를 내기 시작한다


본인들의 도덕적인 가치명분의 우위를 두고 법률을 깡그리 무시하며 시위대 무기수준을 달랐으나

광주사태는-소총,장갑차,TNT,수류탄 

광우사태-쇠파이프,새총,화염병,각목등 등장


3번째 - 악질적인 유언비어 잔치판


광우사태.png


광우사태에서 알다 시피 상상력에 의존한 근거없는 악질적인 유언비어 잔치판이 었다

마치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면 국민전체가 북괴화학탄 공격에 당하는것 처럼 

다 죽는다는 감성팔이+유언비어 확대 재생산등으로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광주사태 유언비어.png


광주사태 역시 경상도 군인 운운하며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유언비어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었다 등등 악질적인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광주홍어들을

선동한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점은 있다 90년대 법관들은 이를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했고


2000년도 검찰은 이들 촛불사태 주동자 진보연대에 대해서 명백한 체제전복행위 라고 규정했는데


1997년 법관들은 이를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문 ‘3 1국헌문란의 목적 (2)’ 셋째 단락은 이렇게 판결한다.

 

그러나 원심이 적법하게 인정한 바와 같이피고인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이 사건 시위진압 행위는 피고인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고이는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7)




요약 하자면 1997년도 대법관들은 광주폭도들+최규하+국무위원들을 한편으로 보고 있다

광주폭도들이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을 강압을 당하고 있다는 전제로 광주폭도들이 이에 분노를 느껴 항거

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위한 정당행위로 규정한다


그러나 위에 선언문은 어떠한가 광주폭도들은 수많은 증거에서

최규하+국무위원+전두환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폭도들을  진압한게 국헌문란 행위라고 한다


광주폭도들이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이 강압당하고 있기때문에 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어찌 이런 법리논리가 가능한가 이 논리를  광우사태에 비추어 보면


촛불폭도들은 이명박 물러가라 이명박탄핵 하라고 외치며 청와대로 진격을 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헌정수호 행위이고 이 촛불폭도들을 진압하면

국헌문란 행위 즉 내란이라는 논리와 같은 논리이다


과연 2008년에 이러한 판결이 나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까??


그렇기에 광주사태 법관들은 광주사태 본질도 모르고 선언문 조차 읽어보지도 않고 판결을 내렸거나

억지 논리로 끼워 맞추다 보니 이러한 엉터리 판단을 내린것이다


광주사태는 광우사태에 비추어보면 명백한 국가전복행위다



세줄 요약

1.광주사태와 광우병촛불난동은 공통점이 많다


2.하지만 1997년 법관들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 하였으면 2008년 광우사태는 명백한 국가전복행위라고 규정


3.광주사태는 광우사태에 비추어 보면 명백한 국가반란행위 내지 폭동이다

광주사태가 내란인 이유를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판결 논리에

따라 대입시켜 내란인 이유를 설명해보겟다 긴글이지만 읽어보면 좋겟다


우선 광주사태에 대하여 우리나라 대법원은 2가지 판결을 했다 

80년대 대법원은 광주사태는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이라고 판결하였고


90년대 대법원은 광주사태를 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가 내란이라고 판결하였다

즉 2가지 내란설이 대립하고 있다 어느 판결이 맞는 판결인가


광주사태 1.png




우선 97년 대법원 판결문을 보도록 하자


1997년 대법원 판결문 ‘3 1국헌문란의 목적 (2)’ 셋째 단락은 이렇게 판결한다.

 

그러나 원심이 적법하게 인정한 바와 같이피고인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이 사건 시위진압 행위는 피고인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고이는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7)



 


광주시위대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시위구호와 많은 성명서,

5.18기록물에서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을 적 으로 간주하고 있다 


4.jpg

개같은 최규하 표현력 ㅍㅌㅊ??


강압하고 있는 대통령을 위해 항거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근거가 될 기록이나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김대중 석방하라 라고 외 쳤다


광주폭도들은 최규하에 충성하는 세력이었는가 김대중 에게 충성하는 세력이었는가?


자 중요한건 빨간색 줄쳐진 부분이다


요약 하자면 광주폭도들은 진압하면 안되는데 진압했고 그리고 무었보다 이 시위를 난폭하게

진압하는 전두환(신군부)을 보고

최규하와 + 국무위원들(헌법기관을 강압,위협)이 위협을 느꼇기 때문에 국헌문란 행위 즉 내란이라는 것이다


내란죄에 구성요건은 2가지다


국헌문란: 헌법에 의하여 설립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기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

[네이버 지식백과] 국헌문란 [國憲紊亂] (법률용어사전, 2010.1.15, 법문북스)


국토참절: 영토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배제하는 것이다 즉 나라안에 위법으로 다른나라를 세웠거나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보듯이 대한민국 영토는 한바도와 부석도서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헌법이 한반도 안에서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 영토를 참절당했기 때문에

             북한이 반란단체인 이유가 우리 영토인 한반도 이북을 북한이 불법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2두가지가 내란죄 구성요건인데 97년도 대법원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광주사태를 진압했기 때문에

위협을 헌법에 의해 설립된 국가기관 대통령+국무위원들이 벌벌떨어 기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그것이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했다


new_7.jpg



그렇다면 이 논리를 적용하면 최돼지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신현확 내각 총사퇴하라 라며

교도소를 공격하고 경찰과 군인을 깔아죽이고 수십개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한 시위대에게는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이 위협은 안느꼇다라는 뜻인가??


시위진압하는걸 보고 강압을 느꼇던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인데 실탄을 장전하고 정부를 전복하겟다고

발기하고 달려드는 저 시위대를 보고는 위협이 안된다는 말인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논리에 따르면 이 행위 또한 국헌문란 행위이다 

관공서를 파괴하고 경찰서를 불태우고 헌법에 의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찢어죽이겟다는건

왜 국헌문란 행위가 아니고 정당행위 인가??


2번째 국토참절에 관하여


21일 오후 전라남도 도청이 폭도들에 의하여 함락이 되었다 폭도들은 해방구라며 선동했다

당시 시민군에 우호적인 태도로 

기사를 쓰던 김영택에 기록을 가져와 본다


광주사태 내란.png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 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음 기록은 국토참절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광주사태 내란1.png


자 이렇듯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논리 대로 판결하자면

광주사태는 ``국헌문란``  ,  ``국토참절`` 2개의 구성요건을 다 갖춘 명백한 폭동이자 내란이며 체제 전복행위이다


이런 논리적 접근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 이고 모순점이 많으며 좌빨 좌좀들은 맨날 광주사태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할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논리를 가지고 덤벼들때 적절히 산업화 해줘라


5.17비상계엄확대 일때 수경사 병력이 중앙청을 포위한걸 가지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그것 역시 국무위원들에게 강압을 했다고 주장한다면 광주폭도들의 저 행위들은 무었인가?


참고로 노태우는 당시 계엄상황이고 국무위원들을 보호 하려 했다고 경비병력이라고

주장했다 이주장을 반박하려면 직접적 위협이 있었는지 증명해야 하는데 증명하지 못했다

강압을 느꼇다?? 라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강압에 의해 어쩔수 없이 5.17비상계엄령을 통과 시켰다는

증언이라도 있어야 될것 아닌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전부 천리안 독심술 내지 관심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신군부에 강압을 받았다 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최규하는 끝내 진술을 거부 했으며

국무총리 신현확도 그런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80년 5월 17일로 돌아가 보니 신현확과 국무위원 맘속에는

전두환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는 주관적판단이다


주관적 판단을 결코 객관적 판단이 될수 없다



3줄요약


1.광주사태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논리로 본다면


2.내란죄 구성요소인 국헌문란,국토참절 2가지 행위에 해당된다


3.광주사태는 폭동 or 내란이다

SNS로 공유하기
< 1 2 3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