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이돈이다 | 13-10-23 03:25:18 | 조회 : 811 | 추천 : -
1992 대선을 앞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기업인 이명박은 아주 매력적인 카드였다.
'샐러리맨의 신화'이자 최고의 경제전문가인 이명박을 곁에 둔다면,
'민주팔이 김영삼은 경제를 모른다'는 이미지를 희석할 수 있으며,
상대 후보 정주영에 대한 최고급 네거티브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영삼은 이명박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은 1992년을 끝으로
현대그룹을 퇴사하고 민자당의 전국구 의원으로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사실 이명박으로서는 평생의 동반자 정주영 후보와 다른 당에서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김영삼과 민자당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1992 대선의 승리였다.
김영삼과 정주영이 박빙의 대결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김영삼은 이명박에게 정주영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정주영이 얼마나 부패한 인물인지, 여자관계는 어땠는지 등을 찬조연설을 통해 폭로하여,
정주영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것이 이명박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명박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이명박에게 정주영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오해가 쌓이고 쌓여 안타깝게 정주영과 이명박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이명박이 팔걷고 나서서 정주영을 흠집내는 일은 도의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또한 그것은 정치공학적으로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명박이 정주영을 헐뜯는다면 사람들은 이명박을 배신자로 생각할 것이며
폭로를 지시한 김영삼은 더 나쁜 놈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명박은 정주영을 공격하라는 김영삼의 명을 거부하였다.
다행히도 그 해 김영삼 후보는 김대중, 정주영 후보를 크게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하지만 김영삼에게 이명박은 이미 '찍힌 놈'이었다.
정계에 입문한지 채 1년이 되지 못한 일개 초선 의원이
'정계의 대부 김영삼'의 명을 어기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명박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였고, 곧 그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가 열리는 1995년,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이명박 의원은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출간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올렸고, 정치에 경영마인드를 접목한 새 정치의 기수로서
이명박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민자당 내에서는 분위기가 달랐다.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로는
이미 김영삼의 측근 정원식 씨를 '내정'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명박 측은 크게 당황했다.
'내정이라니?? 당 내부의 경선에서 승리한 사람이 후보가 되는 것이지,
대통령이 점찍은 사람이 경선도 치루지않고 후보가 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민주투사 김영삼 식 정치인가?'
이명박은 즉시 반발을 하고 나섰다.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는 반드시 경선을 통해 선출되어야 하며,
경선도 없이 정원식이 후보로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 또한 크게 화를 냈다. '찍힌 놈' 이명박이 감히 대통령의
결정에 또다시 반기를 드는 것에 대해 김영삼은 분기를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명박을 누를 명분이 없었다. 이명박의 말이 논리적으로 다 옳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영삼은 협의를 위해 이명박을 청와대로 부르게 된다.
김영삼을 독대한 이명박은 뜻을 굽히지 않고 경선을 치룰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경선을 치루는 것이 적법한 절차이기도 하거니와, 설령 정원식이 후보가 되더라도
경선을 거쳐서 나가는 쪽이 김영삼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각하. 경선을 치루지 않으면, 선거에서 졌을 시에 각하께서 모든 책임을 지셔야합니다.
하지만 경선을 치룬 후보가 선거에서 진다면, 그것은 당의 책임이지 각하의 책임이 아닙니다.
꼭 경선을 하셔야 합니다."
정치 신인 이명박은 당돌하게 김영삼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청와대를 나왔다.
그리하여 민자당은 1995년 서울시장 선거를 위한 내부 경선을 치루게 된다.
정원식과 이명박, 두 사람은 당원 투표의 승리를 위해 치열한 기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역시 대세는 정원식이었다. 민자당의 황제 김영삼의 뜻을 감히 거스를
당원이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러나 이명박은 '떳떳한 패배'를 원했다.
그것이 그가 경선을 줄기차게 주장한 이유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경선마저도 석연치가 않았다.
서울의 모 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너무나도 이상한 경선이었다.
상대 후보 정원식이 등장할 때는 당원들의 환호가 하늘을 찌르더니,
이명박이 등장할 때는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연설을 할 때는 누군가가 음향 장치에 손을 대서
소리를 멋대로 줄였다 키웠다, 또 마이크를 껐다 켰다하면서 그의 연설을 방해하였다.
결국 이명박은 경선에서 참패하였다. 하지만 이명박에게는 후회가 없었다.
최선을 다했고, 무엇보다 자신은 떳떳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크게 감동한 민자당 청년당원들은 경선이 끝난 이후
눈물을 글썽이며 이명박의 이름을 크게 연호했다고 한다.
(그 후,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민자당 정원식은 1995 서울시장 선거에서
조순 후보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시간은 또 흘러 15대 총선이 열리는 1996년이 되었다.
이명박 의원은 '정치 1번지' 종로구 후보로 공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특혜가 아니었다.
종로구는 거물급 정치인들의 승리가 예상되던
절대 우세로 평가받던 4선 의원 이종찬과
전 장군님의 청문회에서 크게 행패를 부려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이 이명박의 라이벌이었다.
대세 이종찬은 연륜을 앞세우며 표몰이를 시도했고,
노무현은 자전거 부대를 꾸려 종로 곳곳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하였다.
이에, 이명박은 새정치론을 내세우며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명박 의원은 이종찬, 노무현을 누르고 종로구의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불굴의 노력으로 사지(死地)를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시련은 끝이 나지 않았다. 이명박 총선 캠프 직원의 폭로로 인해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된다.
법정 선거비용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한 것이 선거법에 저촉된 것이었다.
이명박의 형, 이상득 의원이 종로구 총선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며 지출한 비용이
선거법 상의 한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에 김영삼은 신이 났다. 드디어 이명박의 꼬리를 잡은 것이다.
전격적으로 이명박을 구속 수사할 것을 검찰에게 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지만,
금품 제공과 같은 중차대한 비리도 아닌 혐의에 대해
구속기소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이치에 어긋남을 알았던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의원은
검사 시절 조사해놓은 김영삼의 불법 비자금 자료를 폭로하겠다고
당 지도부를 협박하며 이명박을 구속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렇게 이명박은 구속 기소의 위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대법원까지 간 그의 항고는 벌금 400만원 형으로 의원직 박탈과
5년간 피선거권 박탈 확정으로 판결이 났다.
물론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에 그는 의원직을 사퇴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상 의원직 박탈이었다.
한때 '기수파괴론'과 '새 정치론'을 내세우며 1997 대선을 꿈꾸었던
이명박은 조지워싱턴대의 객원연구원으로 쓸쓸히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재기의 희망을 엿보게 된다.
재미 동포들은 아직 그의 신화를 잊지않고 그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다시 희망을 품으며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그에게 기회가 왔다. 2000년 8월 15일 밀레니엄 광복절을 맞이해
정부는 이명박을 포함한 3만명을 대상으로 사면 및 복권의 대사령을 내린다.
드디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그는 2002년 서울시장 선거를 목표로
칼을 갈고 또 갈았다.
마침내 2002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의 라이벌 홍사덕 의원이
후보직 사퇴를 하면서 이명박은 본선으로로 직행하게 된다.
그의 상대는 민주당 김민석 의원이었다.
훤칠한 얼굴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차세대 대권 주자로 평가받던 김민석은
선거 초반부터 선거를 주도하였다.
한편 이명박은 여론조사에서도 밀렸지만,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도 힘겨웠다.
김민석 후보가 서울시에 자료를 요청하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자료를 받았지만,
이명박 후보는 모든 자료를 직접 조사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했다.
그러나 이명박에게는 '청계천 복원 사업' 등 서울시를 발전시킬 비전이 있었다.
김민석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외모와 언변이 그의 전부였을 뿐이다.
이명박은 여론조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뚝심있게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대망의 양자간 토론에서 김민석을 누르면서 그의 지지도를 따라잡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당히 당선된다.
온갖 어려움이 그의 정치 인생을 위협했지만, 그는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정치인생에 레드카펫이 깔렸다.
청계천 복원사업, 대중교통 시스템 개혁에서 그의 진가를 알게 된 국민들의 무한한 찬사,
이어지는 2007년 대선의 압승. 그리고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경제대통령의 칭호를 얻기까지..
오로지 무한한 영광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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