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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대한민국 ‘이용문’ 장군의 애국정신이 필요하다 [1]

상병 국가안보 | 14-03-12 09:20:53 | 조회 : 1541 | 추천 : +2


위기의 대한민국 ‘이용문’ 장군의 애국정신이 필요하다참 군인의 원칙적 정신-용광로 같은 포용정신의 지휘관
  
▲ 이용문 장군(가운데) ⓒ 인터넷 캡처

끊임없는 도발을 일삼는 북한과 이를 두둔하며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종북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지금 6.25남침전쟁에서 조국수호에 앞장서온 이용문 장군의 가치와 정신이 요구되고 있다.


이용문 장군은 일제의 패망 후인 1948년 11월 제7기 특임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육군 소령으로 임관했다. 한 달 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여 초대 기갑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4월 대령으로 진급한 뒤, 같은 해 7월 백선엽 장군에 이어 제2대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했다.


북한군과 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지던 1949년 10월 그는 옹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지만, 다시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전보되어 재직하던 중 6.25남침전쟁을 겪게 됐다.


1951년 3월경 제9사단 부사단장에 임명된 그는 1952년 7월 수도사단장에 보임,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를 수행했다. 당시 7월 20일부터 10월 10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공군 제12군 예하의 제34사단과 제35사단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다섯 차례의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이용문 장군은 탁월한 통솔력과 과감한 전투정신을 통해 진지 확보에 성공했다. 피탈된 고지를 탈환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7월 17일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사후에 추서 받았다.


6.25 남침전쟁 당시 그는 연락 겸 독전요원으로 서울방어선에 투입됐다. 그러나 적 전차부대의 공격을 받아 부대가 분산됨에 따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게릴라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식량 및 장비 등의 부족으로 부하들을 해산하고 시내로 잠입했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군 수사기관에 의해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이용문 장군은 제9사단 부사단장, 수도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송계리전투, 현리전투에서 적을 격퇴했고, 1952년 7월 수도사단장(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 취임해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중공군 12군 예하 34‧35사단 2,4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 이룩했다.


이 장군은 10월 남부지구경비사령부 제2대 사령관(전북 남원)으로 전보되어 지리산 등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던 중 이듬해 1953년 6월 24일 항공작전 지휘 중 비행기 추락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국가안보 위기 상황에서 오로지 나라사랑 정신으로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을 구해낸 이용문 장군의 가치와 애국정신이 필요한 때다.

● 생몰연대 : 1916.1.22-1953.6.24 
● 출신지역 : 평남 평양 
● 최종계급 : 육군 소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1916 1 평남 평양 출생
*1948. 11 육군사관학교 입교 및 육군소령 임관
*1948. 11 육군 기갑단장
*1949. 10 옹진지구전투사령관
*1949. 10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1951. 6 육본 작전교육국장
*1951. 8 육군준장
*1952. 3 제 9사단 부사단장
*1952. 7 수도사단장
*1952. 10 남부지구경비사령부사령관
*1953. 6 전사
*1953. 6 육군소장(추서)
 

  
▲ 지난 3월 5일 故 이용문 장군실 개관식 행사에서 방문객들이 전시품을 관람하고 있다. ⓒ 국방일보


 

「참 군인의 원칙적 정신」과
「용광로 같은 포용정신」의 지휘관


  생애 전체를 전쟁터에서 보내고 국가의 생존․전진․번영의 원칙과 국가에 대한 충성․개혁의지로 삶을 살았던 晩翠 이용문 장군.  

  학창시절 외에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에 임하였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국가의 모든 현상에 대해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들과 부조리와 잘못된 것에 대하여 개선과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의 두 유형이 있습니다. 이용문 장군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싸웠지만 건군 당시부터 전쟁 중에도 軍과 그 당시 정부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개선과 개혁을 주장하면서 휴전을 끝까지 반대하다 전사하셨습니다. 국가수호의 원칙적인 참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개혁의 제창과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혜안, 용광로와 같은 포용력의 정신으로 부하장병을 지휘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동력이 핵심"이라고 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기갑연대를 창설하고 준비된 기갑병력으로 6.25 남침전쟁에 대처하였으며, "국가안보에는 정보력이 핵심"이라고 주장하고 원칙적인 軍 정보업무 강화작업을 하셨습니다. 
            
  6.25 남침전쟁 직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서 불철주야 국가안보 수호에 전력을 다하였고 당시 정권 상부에서「정치인 동향 파악지시」를 하자 "어찌 軍이 정치인 동향감시를 합니까. 北의 남침정보가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못합니다!"라고 거부하여 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전보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개전되고 국군이 계속 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지휘관들이 부족하여 당시 전투경험이 많은 이용문 장군을 수도서울 사수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되었고 6월 28일 서울 북부 방어에 투입되어 최후까지 수도서울을 사수하셨습니다.  서울이 敵에 함락된 후에도 후퇴하는 부하장병들을 결집하여 남산에서 5일간 게릴라전을 전개하셨습니다.  

  敵 치하에서 3개월간, 9.28 수복 때까지 행상으로 변복하여 북괴군의 동향분석 활동 후 9.28 수복과 함께 9사단 부사단장, 육군본부 작전국장, 수도사단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작전국장 당시에도 "군인은 국가수호와 안보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은 안보가 취약하였을 때 멸망하였다. 軍이 선각자적인 사명의식을 갖고 국민과 국가지킴의 선각자적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유훈을 남겼으며, 자유당 국회의원의 동향에 대하여 軍을 동원하라는 지시에 대해 거절하면서 "軍은 정치의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정치를 잘 알아야 한다. 정치에 軍이 이용당해서는 아니 된다"라는 훈시를 남기셨습니다.  

  9사단 부사단장 시절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투지경선이 노출되어 불가피하게 철수를 하게 된 상황에서 최고 지휘관이 계급장을 떼어 내자 이용문 장군은 지휘관 휘장을 붙이고 "나를 따르라 내 책임 하에 승리로 이끌겠다" 고 하셨으며 이용문 장군이 총지휘를 하고 박정희 참모장이 밀착하여 보좌하는 가운데 진군하였고 총탄이 비오듯 하는 가운데에서도 軍의 국가발전에 대한 사명에 대하여 두 분께서 토론하였으며 이용문장군의 실전에 기초한 질서있는 작전지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용문 장군은 1952년 7월부터 10월까지 휴전회담 중의 격전이었던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수도사단장으로서 중공군 12軍 예하 34사단과 35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5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치루었고 3차전에서 敵 2,40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둬 피탈된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탁월한 통솔력과 과감한 전투정신을 인정받아 軍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훈기 제117호)에 추서되었습니다.    

  후일 5.16 당시, 이용문 장군의 주요 참모들이 그 핵심 주도자가 되어 5,000년 한민족 역사 속에서 국가 도약과 경제발전을 이룩한 밑거름을 구축하게 하였고,  5.16 직후 5일만에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실을 방문한 당시 서울법대생 이건개는 그 당시 국가위기 속에서 박정희 장군의 외모에서 풍기는 목숨을 건「강력한 혁명의지의  氣」가「구름 벽」을 만드는 것을 볼 수가 있었으나 김정자 여사(이용문 장군 부인)께서 이용문 장군을 언급하자 마자 얼굴 전체를 파안하면서 웃음과 큰 미소를 띄어 이용문 장군의 용광로와 같은 포용력과 담대함을 가슴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용문장군의 참 군인 정신은 조갑제 선생이 쓴 이용문 장군의 자서전,「젊은 거인의 초상」에서「원칙적인 참 군인정신」과「용광로와 같은 포용정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비록 1953년 6월 24일 전투지휘 중 장렬히 전사하셨지만 삶과 생명의 존재는 영원하여 대한민국이 극히 어려운 시기와 죽음의 계곡에 이르게 되는 위기에 다시금 도움과 계시로 대한민국의 국운을 살리는 사명의 역할을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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