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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친일파 [4]

중위 외길인생 | 16-03-21 16:37:26 | 조회 : 1870 | 추천 : +1


일본도를 휘두른 사단장들

진실의 말팔매 <2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6.25전쟁 시기 한국군 제6사단 방첩부대(HID) 행정과장이었던 김용태가 <월간조선> 2002년 4월호에 실린 회고담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1952년 6월 19일, 그가 배속된 한국군 제6사단은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산에서 취침하던 중에 중국인민지원군 3개 사단의 야간기습공격을 받고 너무 경황이 없어 군화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도망갔다. 한국군 제6사단 사단장은 장도영이었는데, 그도 다른 사병들과 뒤섞여 산꼭대기로 도망갔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산아래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산꼭대기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포로로 잡히게 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장도영은 움켜쥐고 있던 일본도로 할복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 때 곁에 있던 김용태가 "사단장 각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수가 죽으면 부하들은 어떻게 합니까. 용기를 가지십시오"라고 말하며 일본도를 빼앗았다고 한다. 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6사단 사단장 장도영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8.15 해방 전에 장도영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하급장교로 일제를 위해 충성한 친일반역자였으므로, 일본군에 있을 때 일본도를 휘두르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군 사단장이 되어서도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장도영만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한 게 아니라, 당시 한국군 사단장들이 거의 모두 그러하였다는 점이다. 김용태는 6.25전쟁을 회고한 대목에서 "그 때 사단장들은 일본도를 갖고 다녔어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6.25 전쟁 시기에 한국군 지휘관들이 거의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일제를 위해 충성한 친일반역자들이었음을 말해준다. 친일반역세력으로 구성된 당시 한국군 지휘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국방장관 신태영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중좌였다. 국방차관 김일환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경리장교였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으로 일본 육군병기학교 교관을 지냈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포병 중좌였다. 채병덕의 뒤를 이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생으로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간도헌병대 대장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고등군사학교 졸업예정자였다. 해병대사령관 신현준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대위였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를 졸업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관동군 헌병 오장이었다. 육군보병학교 교장 박임항은 만주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항공부대 중좌였다. 1군단장 김백일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다. 공군 비행단장 이근석은 일본 구마다니비행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위였다. 육군 준장 김석원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군 군관학교 교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중교(중령)였다.


△6.25 전쟁시기 백선엽 대령과 미군사고문 패리스 중령이 지도를 보며 626고지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 백선엽은 일제 시기 만주 군관학교 9기생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에 앞장 선  간도특설대 소속 만주군 중위였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선에 있었던 한국군 사단장들도 모두 친일반역자들이었다.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만주군 군관학교 9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간도특설대 소속 만주군 중위였다. 제2사단 사단장 이형근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포병 대위였다. 제3사단 사단장 유승렬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제5 사단 사단장 이응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제6사단 사단장 김종오는 일제에 징병되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소위였다. 제7사단 사단장 유재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위였다. 제8사단 사단장 이성가는 중국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당시 중국 군벌 장교였다.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이종찬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소좌였다. 황해도 옹진반도에 배치된 제17독립보병연대 연대장 백인엽은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위였다.

이 처럼 친일반역세력으로 구성된 한국군 지휘부에 맞서 6.25전쟁을 벌인 북측의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어떠하였을까?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인민군 제1군단장 김웅은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신사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고, 제2군단장 무정은 중국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팔로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인민군 제1사단 사단장 최광, 제2사단 사단장 최현, 제3사단 사단장 리영호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4사단 사단장 리권무는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5사단 사단장 오백룡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6사단 사단장 방호산은 팔로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제7사단 사단장 전우, 제9사단 사단장 박효삼은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제13사단 사단장 최용진, 제15사단 사단장 박성철, 제105전차여단 여단장 류경수, 776부대장 오진우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위의 사실을 읽어보면, 6.25전쟁 시기 한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친일반역자들이 지휘하였고, 조선인민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조선의용군 출신 항일혁명투사들이 지휘하였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8.15 해방 직후 일본군 군복과 만주군 군복을 벗어던지고 각처에 은신하며 친일반역죄 처벌을 모면하고 있었던 그들을 데려가 한국군 지휘관 모자를 씌워준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국이 친일반역죄를 덮어주고 그들을 한국군 지휘관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6.25전쟁의 성격을 동족상잔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부정확하며,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과 미국을 반대한 항일혁명세력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이 6.25전쟁의 주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한국군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로 되었다.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은 '북진통일'을 위해 싸웠고, 미국을 반대한 항일혁명세력은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다. 6.25전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어언 61년 세월이 흘렀건만,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1년 6월 25일 작성)

 



나라에 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비록 클지라도 반드시 망할 것이요,
사람에게 착한 뜻이 없으면 힘이 있을
지라도 반드시 상하고 말 것이다. - 회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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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령 왓타임9년 전 | 신고

    이 글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문장의 흐름이나 단어선택부분이 종북이 쓴거같다
  • 중위 외길인생9년 전 | 신고

    @왓타임정부에서 종북으로 지정 접속차단되기도 했음, 글내용 자체가 충격이라 누가좀 자세한 정보좀 알려줄까해서 퍼온거임
  • 대령 왓타임9년 전 | 신고

    @외길인생내 얕은 지식으로 답변드림
    어느정도 맞는 말이긴함  정부초기 미군정이  남한의 군,경을 조직할때 일제 군과 경에 복무하던 경력자들을 많이 뽑음 특히나 국군이 경비단이였던 완전 초기에는 일제군복과 무기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었음
    하지만 우리군에도 독립군 출신들도 있었음 고위급으로 갈 수록  친일파가 더 많았던거지..
    또 저 글에는  북한군에 항일투쟁용사가 많다고 하는데 일리있는 말이지만 과장된 부분도 상당히 많음 김일성이 정권의 정당성을 명목으로 많이 과장한거지..그말은 즉 말이 독립투사였지 도망만 다니기 바쁘고 별 다른 성과 못낸사람도 많았다는거지
    추가로 북한의 독립투사들 중에는  중국의 팔로군이나 소련군에 입대해서 싸운 사람들도 많음 그렇기 때문에 북한군에 독립투사 비율이 좀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지
  • 소장 자지복9년 전 | 신고

    @왓타임ㅇㅈ 흥미롭게읽다가 북한 물타기하는거보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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