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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과 어느 졸장(!?)의 이야기

중사 술집여자 | 25-04-03 10:57:23 | 조회 : 768 | 추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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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명장이라하면 누구를 뽑을까?
아마도 춘천전투의 김종오 장군, 다부동의 백선엽 장군, 한강지연전의 김홍일 장군을 많이들 생각할거야.

그렇다면 졸장은 누구라고 생각할까? 전쟁 초기 패퇴의 책임자인 채병덕이나 신성모를 뽑겠지만, 누군가는 개전초 의정부 전투나 현리전투 당시 지휘관인 유재흥을 뽑기도 해, 최근엔 덜했졌지만 이사람이 2011년 타계하기 전까지도 한국의 무다구치 렌야같은 졸장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인적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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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억까로 치명적 패배+일본군 대위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더블 크라운으로,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었던 유재흥은 최근들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는데 바로 제주 4.3사건 사령관 당시 모범적인 대민작전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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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로동당 제주지역 총책 김달삼)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지부 총책 김달삼이 중앙당과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경찰서와 국가시설을 습격하여 일어난 제주 4.3사건은 제주라는 섬을 피로 물들게 만들어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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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군정 당시 남한의 치안 총책임자인 조병옥이나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은 강경진압을 주문했고,
송요찬은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리는데

해안선기준 5km 외부의 내륙지방을 적성지역으로 규정하고, 이 지역에서 발견시 즉각 총살이라는 명령을 내렸어. 이 명령으로 제주도의 중간산 마을에 사는 주민들 입장에선 삶의 터전을 버려야하는데 과연 쉽게 고향을 떠날수 있었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개령에도 불구하고 터전을 떠나지 못하고, 이는 무수한 양민학살이라는 비극을 낳게되어버리지.

군경은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은 초토화 작전을 시작하고, 특히 2연대장 함병선 대령(사진속 인물)의 부임시기에는 초토화 작전으로 그 강도가 강해져서 무수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해버리는데 49년 2월까지 1년간 최소 1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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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죽고 죽이는 상황속에서 49년 3월 유재흥 대령이 진압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하는데 그의 부임은 제주 4.3사건의 일종의 터닝포인트야. 그동안의 강경일변도의 진압방식을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는 전략으로 바뀐거야.

그동안 산간지역의 주민들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어. 그래서 이들은 더더욱 해안가에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지. 따라서 토벌군 입장에서는 게릴라와 일반 주민들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어.

유재흥은 제주주민들에 대한 대민지원과 함께 자진 하산자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겠노라 약속했어.
이 소식은 군경을 피해 숨어살던 산간지역의 주민들에게 전해졌고, 그가 부임한지 두달만에 2만명이 하산했지. 

이 시기 하산자에 대하여 철저한 심문을 통해 민간인과 게릴라를 구분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방지했어. 특히 게릴라라 하더라도 비전투요원이면 즉시 석방을 하고, 이들이 자신의 동료들을 회유해서 돌아오면 그들에 대한 선처를 약속했고, 이를 이행했지. 

이로써 민간인과 게릴라의 구분이 모호했던 이전과 달리 무장 게릴라들을 확실히 구분하여 효과적인 토벌 작전을 수행할수 있었어.

유재흥은 5월부로 사령관직에서 떠나지만 6월달에 이르러 게릴라의 정신적 지주인 이덕구를 사살하며 게릴라들의 활동은 사실상 소멸해버려. 물론 50년대 이후에도 이들의 투쟁은 계속되었지만 국지적인 상황에 불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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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은 이 공로로 이후 군에서 승승장구했으나
그가 지휘관인 시절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그에 대한 평판이 절하되고 말아.

사실 그는 질만한 전투는 지고, 이길만한 전투는 이긴 평범한 군사적 재능의 지휘관이었고, 행정적인 능력과 민사능력은 유능하다고 동료들은 평가했어

물론 그는 일본군 경력이나, 현리전투의 대패라는 결과에서 절대로 자유로울수 없어.

그렇지만 제주도에서 보여준 지극히 상식적인 그의 전략은 광기에 휩싸인 제주에서 추가적인 무고한 희생자를 막을수있었어.

실제로 당대 제주도민들은 그가 떠나자 함병선같은 사람이 다시올까 걱정도 많이했고, 지금도 4.3사건의 연구자들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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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야 한다" 이 당시 대한민국의 치안의 총책임자인 조병옥의 워딩이야. 그는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시키고 군민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토벌을 지시했고, 협상을 주장하는 온건파를 해임시키는등 제주 4.3사건에 있어서 가장 큰 책임자중 하나야.

 제주도민에겐 악마같은 조병옥도 일생동안 조국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점에서 그 공로를 무시할 수 없어

반대로 민족반역자인 유재흥은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역사적 평가를 함에 있어서 단편적으로만 보는것은 지양해야 할거야.

77주년이된 제주 4.3사건은 분명 남로당의 내란으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토벌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 대한민국 정부의 실책도 절대로 간과할수는 없어.
오늘 하루만큼은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디시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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