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쿠르릉- .. 쿠구궁-..
솨아아아아아아-
검은 하늘에서 차가운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밤
구름이 쪼개지며 빛이 새어나오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는 한 밤 중에
빗소리에 낯선 소리가 은밀하게 숨어 묻혀나오고 있었다
턱턱턱턱턱턱 찰박찰박찰박 툭툭툭
"김상경님!,, 헉헉,, 김상경님!!!"
제주항의 아름다운 불빛이 아래로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사.ㅇ..흐..경..흑흑... 김사.ㅇ...으흐흐흑"
가파른 절벽. 그 아래 저 멀리 보이는 아기자기한 불빛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등대와 등대가 뿜어내는 찬란한 불빛
이 것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존재 하나가 사라봉 절벽 위에서 절망에 찬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는 다시 이성을 찾은 듯 하던 일을 계속 이어나갔다
"김상경님! 김상경님! 큰일났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김상경님!"
"...뭐야 씨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살짝 부어 반쯤 감긴 눈으로 일어난 김철기 상경이 던진 첫마디였다
"야이 새끼야.. 미쳤냐? 쳐돌았냐? 어디 앞도 쳐 안보이는 이경 찌끄레기 새끼가 시끄럽게 고참 몸을 흔들어 깨워?"
그는 반쯤 잠겨서 다소 낮아진 톤으로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지금 몇시냐? 지금이 거점 철수시간이냐? 아니면 교대해달라고? 나보고 근무 또 서라고? 이 씨빨새끼를 진짜..오늘 진짜 니네 작정했냐? 아주 엉? 이 씨빨새끼들아!!!"
단단히 화가 났는지 김철기 상경의 목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나갈 정도로 커졌다
"이경 김성호!..김철기 상경님..큰일났습니다.. 진짜..어흑... 큰일났습니다.. 으흐흑"
"울어? 후..넌 초소 들어가서 보자 개새끼야.. 고참이 뭐라고 했다고 울어? 이 씨발새끼들이 존나 빠져가지고 니들.."
"김정민 일경이 죽은 것 같습니다..으흑흑.."
순간 정적이 흘렀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김철기 상경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 속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비는 모든 것을 다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더욱 거세고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10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뒤 김철기 상경이 입을 열었다
"김정민이.. 김정민이 어디있어"
"으흑흑흑흑"
"지금부터 우는 순간 나 전역할 때까지 니 군생활 개씨발좆같이 만들어 줄테니까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흑.. 네..알겠습니다.."
"김정민이 어딨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군복이랑 머리 스타일 보니 김정민 일경이 맞는 것 같습니다."
"...따라나와"
김철기 상경은 김성호 이경을 끌고 절벽을 향해 걸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인지, 원래 그런 성격인지 김철기 상경은 서두르지 않았다
절벽에 도착한 그는 휴대용 탐조등을 절벽 아래로 비췄다
절벽 아래에 펼쳐진 자갈밭 위에 익숙한 군복이 엎드린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군복의 한 가운데를 꿰뚫고 꽂꽂히 서 있는 총으로부터 투명한 빗물과 대비되는 진한 빛깔의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탄헬멧은 보이지 않았다
"하..씨히발.."
"......"
김철기 상경은 아무말 없이 5분 정도를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야!"
"이경 김성호!"
"지금 몇시야"
"이경 김성호! 현재시각 04시 44분입니다!"
"... 철수시간 언제야"
"이경 김성호! 철수시간 05시 22분 입니다!"
"...지금부터 딱 한번 말할거니까 잘 알아들어라"
"...네! 알겠습니다!"
"뜸들이지말고 씨발.."
"네! 알겠습니다!.."
"김정민이 거점근무 서다가 혼자 발 헛디뎌서 떨어진거야"
"......"
"대답 안해?"
"아닙니다!... ...그런데 김철기 상경니ㅁ.."
"이 씨발년이 대답 안해?"
"이경 김성호! 아닙니다!"
"군생활 좆되고 싶냐?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말한거 까먹었지? 고참말 개좆호구로 듣지?"
"아닙니ㄷ..."
짝-!
김철기 상경은 김성호 이경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잘 들어 군생활 좆되기 싫으면. 이거 잘못되면 너나 나나 감옥에서 몇 십년?..평생 썩는다 이 씨발새끼야.. 알아들어??"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 씨발 조용히 안해? 주변에 광고하냐?"
"아닙니다.."
"정신 차려라. 김정민이 근무서다 혼자 떨어진거다. 알겠냐?"
"...네.알겠습니다."
김성호 이경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닳은 독사 앞의 개구리처럼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김철기 상경은 다시 휴대용 탐조등으로 절벽 아래 널브러진 군복을 비췄다
여전히 군복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가운데에서는 진한 무엇인가 계속 흘러나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후우...."
김철기 상경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김성호 이경을 끌고 상황대기실로 들어갔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은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2
부릉- 부릉- 부우우우우우우우우--!!!!!!
"야 야 차 망가진다 그만해 그정도면 됐어"
"아 이게 왜 빠졌는지 말입니다. 하여간 중대똥차 새걸로 보급 안해주는지 말임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보급관한테 가서 함 쇼부쳐봐라. 보급관니임!!! 화끈하게 저희소대 차량 새걸로 하나 해주시지 말임다!! 하고"
"큭큭큭 책잡혀서 기율 갈 일 있습니까? 큭큭" (기율=군기교육대)
"그렇게라도 자꾸 말해서 중대장 귀에 들어가야 보급관이 중대장 눈치라도 볼거 아니냐. 중대장 ROTC 나와서 대위 전역 하고 경간부 시험보고 들어와서 그런지 보급관이 꼼짝을 못하더만"
"경대출신 부대장은 이미 보급관한테 먹혔던데 말입니다 큭큭"
"그니까 중대장이 대단한거지.. 보급관 그 새끼도 좆도 짬도 안되면서 뭐라도 되는양 나댈 때마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씨발.."
"담궈버리시지 말임다 큭큭"
"내가 전역하기 전에 그 새끼 전역시키고 나간다 개새끼.."
"큭큭..그나저나 중대장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경간부 시험 칠 생각을 했는지.. 저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자리부터 알아봤을텐데 말임다."
"그 정도 근성이니 지금 저 위치에 있는 것 아니겠냐. 능력도 있고."
"하긴..그 정도 능력 되니까 그 때도 다 덮었... .."
"... 왜 얘기를 하다 마냐?"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니가 뭘 잘못했냐 잘못은 그 새끼가 한거지..됐고 매점에 아이스크림이나 빨러가자."
"알겠습니다. 먼저 가 계십쇼. 1분내로 마무리 하고 가겠슴다"
김성호 상경은 매점으로 걸어가는 김철기 수경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은 석양의 노곤함 때문인지 곧 전역하는 김철기 수경의 느긋함 때문인지 그림자는 평소보다 훨씬 길게 늘어져 보였다
김철기 수경이 전역하면 소대에서 사라봉에서 있었던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은 김성호 상경 혼자가 된다
사라봉에서의 그 날 이후로 김성호 상경은 한 동안 김철기 수경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철기 수경도 김성호 상경을 찾지 않았고, 김성호 상경도 경례 외에는 부딪히지 않았다
그렇게 2주정도를 지내다가 우연히 창고 뒤 공터에서 김철기 수경이 혼자 쪼그려 앉아 우는 걸 김성호 상경이 목격한뒤로
둘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군대는 참 이상하고 신기한 곳이다
그렇게 무서워했고 가까워 질 수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고참과 친해질 수 있다니..
고참이 우는 모습에 측은함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그 날의 일을 각자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 때부터 둘은 최대한 그 날의 일을 잊으려고 해왔고,
김철기 수경의 전역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이제 끝이구나 싶기라도 한 듯 사뭇 초연해져 있었다
"김철기~! 김철기 불러와!"
소대장이 김철기 수경을 찾았다
"김철기~ 일주일 후에 전역이네~? 조옿~겠다아~전역도 하고 말이야~"
"좋긴 뭐가 좋습니까 나가서 뭐하고 살지 모르겠슴다 흐흐"
"허허 이 새끼 이거. 군생활도 했으면 다 할 수 있지 남자가 그 정도 깡도 없어서 되겠냐? 나 때는 말이야~.."
'지랄한다 씹새끼 어디 쌍팔년도 얘기를 하고있어'
소대장의 지루한 설교가 끝날 때 쯤 김철기 수경이 입을 열었다
"..저기 소대장님"
"어 말해봐"
"저 전역 얼마 안남아서 근무 열외 상태지 말임다"
"어 근데"
"전역하기 전에 화북거점 한번 나가고 싶슴다"
"화북? 거긴 왜 갑자기."
"그냥...전역 전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화북..화북이면...사라봉 근처잖아"
"예"
"......왜?"
"그냥 마지막이기도 하고.."
"너 전역 전에 근무 열외 왜 시켜주는지 아냐?"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군생활 잘하던 새끼도 꼭 전역할 때만 되면 사고를 쳐~"
"......"
"전역할 때가 되면 병신이 되는건지 아님 원래 병신이었는데 참고 군생활 한건지.."
"부탁드립니다. 사고 안치겠습니다. 저 군생활 어떻게 했는지 소대장님이 잘 아시잖습니까"
"우리 김철기야 뭐 군생활 자알~했지 그 일만 빼면.."
"......"
"미안하지만 안되겠다. 무탈하게 조용히 전역하자"
"...알겠습니다."
소대장이 김철기 수경을 근무서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김철기 수경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철기 수경은 사라봉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날의 현장을 재차 확인하며 자기 합리화를 통해 여운을 떨쳐내고 확실히 잊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라봉 거점은 그 날 이후 폐쇄되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화북거점은 사라봉과 가장 가까운, 사라봉이 멀리 위로 보이는 거점이었다
김철기 수경은 침울함과 담담함이 섞여있는 미묘한 표정으로 소대장실을 나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을 철상자로 겹겹이 둘러 싼 듯한 모습이었다
소대장 실 앞에서 한동안 서있던 그는 소대장실 문을 한번 돌아보고는 천천히 내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3
"야 김정민!"
"일경 김..정민.."
"이 새끼야 대답 똑바로 안해?"
"일경 김정..미..민!"
"하 존나 띨빵하네 이 새끼 이거"
"철기야 그만해라 원래 좀 모자르다잖냐"
"그래도 이건 아니지 말임다 군대인데"
"야 김정민! 창고 가서 내 활동화 가져와. 철기야 그만해라!"
"박수경님. 전역 얼마 안남으셨다고 후임들한테 너무 잘해주시는거 아닌지 말임다"
"뭐? 김철기 너 이새끼 많이 컸다? 곧 갈 사람이라고 아주 박박 기어 오르네?"
"제가 틀린말 했는지 말임다? 솔직히 박수경님 이러시는거 소대 분위기에도 안좋습니다"
"이 씨발새끼가 군생활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야이 개새끼야 너 혼자 잘났냐? 곧 전역해서 갈 사람인데 좋은 천사이미지 좀 만들면 안되냐?
넌 안그럴 것 같냐? 언제까지 군생활만 할 것 같냐고 이 씨발새끼가 진짜.."
"박수경님 참으십쇼. 야 김철기 상황실 가서 오늘 근무표 하나 뽑아와"
"...알겠습니다."
불만과 피곤함이 섞인 꿍한 표정으로 김철기 상경은 상황실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김정민 일경. 겉으로 보기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지만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었다
이 때문에 종종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고, 소대원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김철기는 그런 김정민이 이내 못마땅했다
아무리 장애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역 군대에서만큼은 모두가 평등해야한다는게 그의 군대철학이었다
장애가 있다면 공익근무라는 대안이 존재하고, 현역판정을 받은 이상 군생활 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장애가 있으면 공익을 가던가... 왜 현역으로 입대해놓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줘 씨발 좆같게'
생각할 수록 화가 나는 듯 김철기 상경은 신경질 적으로 상황실 문을 열었다
"충성! 상경 김철기 상황실 용무 있어 왔습니다."
"정수경님 근무표 한 장 뽑아주시지 말입니다"
"가져가. 뭔일 있냐? 표정이 왜그러냐?"
"아닙니다."
"아니긴 새끼야~ 뭔데?"
정상기 수경은 김철기 상경의 사수로 박수호 수경의 동기였다
평소에 김철기의 빠릿함을 마음에 들어 했고, 이내 잘 챙겨주었다
"...사실.. 김정민 때문에 말입니다."
김철기는 내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정상기에게 세세히 말했다
"니가 이해 좀 해라. 나나 수호나 전역 얼마 안남아서 안절부절 못해서 그래. 수호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을게. 야 너도 이제 상경인데 좀 쉬엄쉬엄 해~"
"...알겠습니다."
"있다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빨자~"
"사주시는 겁니까?"
"그럼? 니가 사게? 사주면야 나야 좋지~"
"잘먹겠슴다 큭큭"
"이 새끼~ 큭큭 기분 풀어라~"
"알겠습니다."
정상기 수경의 격려에 감정이 조금은 풀린 듯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상황실을 나온 김철기는 근무표를 보고는 이내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라봉 거점 야간 근무자 : 11, 17, 23>
김철기가 속한 부대는 근무표를 석순으로 작성한다
11은 김철기의 석순 즉, 소대 병사들 중에서 11번째로 계급이 높다는 말이 된다
17은 김정민 일경, 23은 김성호 이경의 석순이었다
김철기는 11석에 거점 1석으로 나갈 만큼 풀린 군번이었다
때문에 거점에 가면 근무 시간 동안에는 왕처럼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김철기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 참에 거점에 나가서 김정민 일경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고 잘 타일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소대를 위한 길이고 김정민 일경한테도 좋은 것이라고 자위했다
김철기는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내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4
"김철기 수경님!"
"어 왜?"
"죄송한데 오늘 근무좀 나가셔야지 말임다"
"소대장이 나 근무 못서게 했는데? 근무열외야 나"
"그게 열외신거 아는데 말임다. 촛불시위로 인력 충원 공문 내려왔슴다. 오늘 저녁에 지원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 거점근무는?"
"거점에 인원배정 하고 남는 인원 모두 지원 간다고 부소대장님이 전파하셨슴다."
"그래 알겠다.."
"예 그럼 그렇게 알고 계십쇼."
"잠깐 성호야"
"상경 김성호?"
"너 오늘 근무 어디냐?"
"저 화북이지 말임다"
"..오늘 당직 부소대장이지?"
"예 그렇슴다"
"...화북 근무자 하나 빼고 나 넣어라"
"말년에 왠 거점근무신지 말임다?"
"그냥 마지막이니까 거점 함 가보고 싶네. 부소대장한테는 내가 잘 말할테니까 바꿔"
부소대장은 최근 김철기가 있는 중대로 발령받았다
육지에서 섬으로 발령받은 터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다
왜 육지에서 섬으로 발령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냥 시위 지원 가시지 말임다. 어차피 근무 열외자라 기대마 대기 하셔도 될 것 같은데.." (기대마=버스)
"김성호 이제 짬좀 찼다고 나 갈 사람이라고 막 취급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마지막 부탁이다. 거점 한번만 나가자."
"...그 일 때문이신지 말임다?.."
"......"
"곧 전역이신데 신경쓰지 마시지 말임다"
"......됐다.알겠다"
내무실로 걸어가는 김철기 수경의 뒷모습은 많이 의기소침해 보였다
아니 의기소침한 것인지 아쉬운 것인지 우울한 것인지 정확히 할 수 없었다
다만,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어둡고 초라해 보인다는 것은 분명했다
적어도 김성호 상경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알겠슴다..바꿔드리겠슴다.."
"......"
김철기 수경은 말없이 내무실로 들어갔다
화북으로 가는 길은 언제 봐도 을씨년스러웠다
거점 가는 길에 가로질러가는 마을은 사람이 살긴 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고요하고 음산했다
"김철기! 곧 전역인데 거점근무라니.. 너무 군인 정신이 투철한거 아냐? 아니면 전역기념으로 뭐 하게?"
차량 조수석에서 부소대장이 농담반 의심반으로 말을 걸었다
"아님다! 그냥.. 전역하면 다시 못오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와보고 싶었슴다"
"그래~ 여기가 군대라 칙칙하긴 해도 나가면 생각 많이 나겠지"
"...그럴 것 같슴다"
파도소리가 화북거점이 가까워 졌음을 알려주었다
차량 한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어둡고 음산한 길
그 끝에 자리한 화북거점은 여느 때와 같이 어둡고 황량한 모습이었다
차량이 멈추자 함께 온 김성호 상경과 다른 후임들은 제법 능숙하게 근무준비를 시작했다
"아무쪼록 마지막이니까 딴 생각 있어도 참자. 알겠지?"
"걱정 마십쇼"
"그래... 그럼 수고해"
"충성!"
곧 부소대장이 탑승한 차량의 후미등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멀리서 비치는 등대의 조명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5
김철기는 김정민보다 한 살 어렸다. 김철기는 스무살에 김정민은 스물 한살에 군에 입대했다
둘 다 사회에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군대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김철기는 상경, 김정민은 일경으로 김철기가 김정민의 선임이라는 사실만 남게 되었다
이는 둘 중 한명이 전역하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김철기는 김정민보다 7개월 먼저 자대로 전입했다.
수 많은 부조리와 구태악습 속에서도 나름 간부들과 선임들에게 인정받으며 열심히 군생활을 해온 그는 어느 새 자신이 군생활의 정석, 표본이라는 근본을 알 수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인지 본인이 해왔던 군생활의 기억과 현재 후임들의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 곧 잘 화를 내고는 했다
간부와 선임들이 김철기에게 '군생활 잘한다'고 한 것이 정말 소대를 위해 참된 군인으로써 헌신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단순히 본인들이 편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줘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김철기도 그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수에게, 그 것도 김철기 본인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사실을 주기적으로 되뇌이는 것이 김철기에게는 군생활의 유일한 낙이자 앞으로의 지겨운 군생활을 버틸 활력소였다
부우우우우우웅---- 부웅----
경유차량 한대가 힘겨게 신음을 내며 경사를 오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퍼질 것 같은 소음을 내며 한참을 오른 차량은 곧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여 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음침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차량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두 줄기 빛에 의지한채 얼마쯤 달렸을까
곧 나무가 사라지고 광활한 하늘이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진한 쪽빛 하늘바다에 떠있는 무수히 빛나는 얼음조각들, 그 하늘 한 가운데 토끼 사공이 노를 젓는 차갑게 식은 배 한척이 아무 말 없이 사라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량은 잡초밭 사이를 가로질러 기우뚱 기우뚱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멈춰섰다
잠시 후 장정 여럿이 내리더니 일사분란하게 거점 근무 준비가 이루어졌다
"김철기!"
"상경! 김철기!"
"오면서 하늘 봤냐? 날씨 죽이는데에~"
"예 봤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오호~ 우리 철기 아름답다는 표현도 쓸 줄 아네~? 낭만이 있어 역시~"
"아닙니다!"
"아니긴 임마 큭큭"
소대장은 기분이 좋은 것인지, 허탈한 것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근데 철기야 어쩌냐. 있다 새벽에 비온단다. 판초우의랑 챙겼니?"
"상황실에서 확인하고 바로 챙겼습니다"
"캬~ 역시 김철기야~ 말 안해도 알아서 척척척 척척박사구만 그냥"
"아닙니다!"
"오늘은 비오니까 초소 밖에 오래 있지 말고, 탐조등도 돌리지마, 탐조등 가는 길 발판 많이 낡아서 위험하니까"
"저번에 말씀하신 보수작업 아직 진행 예정 없으십니까?"
"그러게 말이야.. 위에서 예산을 편성해 줘야 뭘 하든지 할건데~.. 잡초 뽑는거 같이 힘만 쓰면 되는거면 진작에 했겠지~"
"발판이 너무 낡아서 위험한 것 같습니다"
"그래그래. 계속 보고 올리고 있으니까 조만간 해결 될거다. 아이고 우리 철기가 이렇게 걱정해주니까 한시름 놓고 산다 내가~"
"아닙니다!"
탐조등은 거점의 외곽 쪽 절벽에 위치해 있었다
탐조등을 감싸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1m 정도의 철근과 나무로 된 발판을 지나야만 했다
발판 아래로는 족히 20m는 되보이는 낭떠러지와 그 아래로 자갈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근무자가... 정민이! 성호!"
"ㅇ일경! 김ㅈ정..민!"
"이경!! 김성호!!!"
"그래그래. 정민이 요즘 군생활 할만 하지?"
"ㄴ..네! 그.그렇습니다!"
"뭐 불편하거나 애로사항 없고?"
"아..아닙니다!!"
"요즘 정민이가 군생활 잘 해줘서 소대장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
"여튼 수고하고.. 우리 막내!"
"이경!! 김성호!!!"
"아이고 이거 군기가 아주 바짝 들었구만? 철기가 너무 갈구는거 아니냐? 큭큭"
"아닙니다!!!"
"그래. 철기랑 정민이 말 잘 듣고.. 오늘 첫 근무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흠...."
소대장은 뭔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사라봉 주변을 훑었다
"그래. 수고하고.. 정민이 성호 있다 철수 때 보자~"
"예!! 알겠습니다!!!"
"그래. 철기 수고하고"
"충성!"
차량이 뒤뚱뒤뚱 거리다 이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후미등 불빛이 사라지자 칠흑같은 어둠이 세 명을 감쌌다
"김성호!"
"이경! 김성호!"
"상황대기실 가서 무전 대기해"
"예 알겠습니다!"
"...김정민"
"......."
"정민아? 고참이 말하는데 대답 해야지?"
"이..일경! 기.김정미.민!"
"그래..정민아. 내가 니가 미워서 그러는게 아냐. 군생활에는 기본적으로 해야 될게 있어. 적어도 고참이 하는 말은 잘 귀담아 듣고 행동 해야지 안그래?"
"......."
"대답 안해?"
"그..ㅈ잘 모못들었.스.습니다"
"하나 이 씨발새끼가 고참 말하는데 귀 안열어? 집중 안해?"
"ㅈ..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너 개새끼 내가... 야 김성호! 상황대기실 문닫고 있어!"
"이경! 김성호! 예! 알겠습니다!"
"무전 요령 아까 내무실에서 알려줬지? 휴대용 무전기로 다 들리니까 실수하지마라"
"예! 알겠습니다!"
김성호 이경이 상황대기실 문을 닫자 주변은 다시 칠흑같은 어둠으로 잠겼다
하늘에 떠있는 차가운 노란 배 한대가 말없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정민"
"이.일경. 김정민.."
"너 내가 말 좆같이 하는거 뭐라 안하겠는데 고참 말할 때 집중하라고 했어 안했어"
"해..했습니..다.."
"그럼 알아 쳐 들어먹어야 될거 아냐!! 이 씨발새끼야!!!"
"......."
"또 대답 안해??"
"ㅈ..죄송..합니다."
"아이 씨팔 좆같은 새끼가 쳐 들어와서 야마돌게 하네 씨발새끼가!! 야이 씨발년아 너 내가 좆같냐? 엉? 이 개새끼가.."
치직- 치지직- 중대에서 근무자 확인- 치직
김철기의 휴대용 무전기가 힘겹게 소리를 뱉어냈다
근무..확인..치직- 사라봉 응답 바람-.. 칙
사라봉 근무자..칙-...어....칙-
사라봉? 사라봉 응답 바람? 칙-
사라봉 근무자 이경 김성호..어..ㅅ수고하십쇼! 칙-
... 사라봉? 칙- 사라봉 근무자 다시 한번 확인 바람? 칙-
아.. 사라봉 근무자 상경 김철기 외 2명..그..근무 중! 칙-
... 사라봉 확인 완료-! 칙-
"......."
"......."
"하..나 이 개쌔끼들이 진짜...야 김정민"
"일경. 김정ㅁ민.."
"아까 내가 무전 가르치라고 한거 제대로 가르쳤냐?"
"ㄴ네.그.그렇습니다.."
"저게 지금 제대로 가르친거야?"
"......."
"이 씨빨새끼가 대답 안해????!!!!!!!!!"
"죄, 죄송합니다!!"
"김성호! 쳐 나와!!!"
"이경!! 김성호!!!"
김성호 이경은 여느 때보다도 빠르게 상황대기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너 무전 누구한테 배웠어"
"이경! 김성호! 기..김정민 일경님께 배웠습니다! 아..!"
"일경님? 아?! 이 좆같은 새끼들이 쌍으로 열받게 하네 씨빨"
"아..아닙니다!!"
"아니긴 씨발새끼야 너 누가 말 그따구로 하라고 했냐? 일경님? 아?? 이 씨발"
"ㅈ..제가 아..알려줬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얼씨구?"
"아..아닙니다! 김정민 일경은 잘 알려주셨는데 제가 잠시 깜빡한 것 같습니다!"
"김성호? 넌 소대 들어가서 보자 씨발새끼야 상황대기실 들어가"
"김철기 상경님!.."
김성호 이경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본인의 실수 때문에 김정민 일경이 더 혼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 이 씨발년들이 단체로 쳐돌았네 이제 내 말이 그냥 좆병신 같은거지? 그런거지?"
"아닙니다!"
곧 자신의 생각이이 주제넘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듯 김성호 이경은 재빠르게 상황대기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쩌면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김성호 이경이 상황대기실 문을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언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곧 날카롭고 끈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것은 팔 위에 앉아 피를 빨고 있는 모기를 잡기 위해 손으로 내려 쳤을 때의 소리와 비슷했다
짝- .. 짝- .. 짝-
그 소리는 때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때로는 불규칙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김성호 이경은 그 소리의 두려움 보다는 그 소리를 일으킨 원인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더 큰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얼마 쯤 지났을까
갑자기 밖이 조용해졌다
소리가 멈추자 김성호 이경은 더욱 불안해졌지만 차마 문을 열 수 없었다
문을 여는 순간 앞으로 꽤 남은 군생활이 힘들어 질 것이라는 사실이 김성호 이경의 판단을 억누르고 있었다
김성호 이경은 그 상태로 꽤 오랜시간을 상황대기실 안에 있어야 했다
"김성호!"
격하게 흥분된 몸이 차츰 안정되면서 피로와 수마가 덮쳐올 즈음 밖에서 김철기 상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 김성호!"
"교대 안해?"
"아..아닙니다!"
김성호 이경은 재빨리 총기와 장구류를 챙겨 상황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존나 빠져가지고 교대시간도 모르고 씨발 소대 좆같이 잘 돌아가네"
김철기 상경은 거의 체념한 듯한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상황대기실로 들어갔다
상황대기실 문이 닫히자 한시름 놓은 듯 김성호 이경은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언제부터인지 하늘의 무수한 얼음 조각들과 노란 배는 자취를 감추고는 보이지 않았다
김성호 이경은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김정민 일경에게로 뛰어갔다
6
"...ㅅ성호야.."
"이경! 김성호!"
"...미안하다.."
"아닙니다!"
"ㄴ내가 ㅁ말도 잘 모.못하고 행동이 ㅈ좀 느려서 마..많이 호.혼나.."
"...아닙니다.."
"ㄴ나도..자..잘하고 싶은..데.. ㅈ잘 안돼.."
김정민 일경은 말을 많이 더듬었다
그러나 김성호 이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회였다면 답답하게 느껴졌을 법도 하지만, 방금 전 폭풍과도 같았던 김철기 상경과의 일이 있은 직후여서 그런지
김철기 상경이 상황대기실로 들어간 이 상황 자체가 너무 값지게 느껴졌다
둘은 간부의 순시를 감시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회에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게임 뭐 좋아 하는지 등의 사소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오갔다
숨막히는 군생활 속에서 겨우 얻은 자유로운 대화의 시간
예상 외로 김정민 일경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김성호 이경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김정민 일경을 바라보는 김성호 이경의 눈에는 측은함과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쿠궁-.. 쿠구구궁-
"......."
"김정민 일경님!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어..어.. 그.그래.."
"...판초우의 가져와도 되는지 알고싶습니다"
"어? 어..아냐. ㄴ내가 가져올게.."
김정민 일경은 상황대기실로 뛰어갔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김정민 일경의 다리가 많이 후들거리는 것을 언뜻 볼 수 있었다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이 아닌 근육의 피로로 인한 떨림 같았다
김성호 이경은 자신이 상황대기실에 있을 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들린 익숙한 목소리로 인해 머릿 속이 하얘졌다
"하 이 좆같은 새끼. 짬을 똥구멍으로 쳐먹었냐??!!! 엉??!!!"
김철기 상경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김정민 일경을 매섭게 쏘아붙였다
"비와서 쉬엄쉬엄 근무서게 해줄라 했더니만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네 개새끼가"
"......"
"좆같은 새끼. 니가 좆같이 구니까 나도 좆같이 해줄께. 오늘 FM대로 근무 서라. 탐조등 시간 맞춰서 돌리고. 알았냐?"
"ㄴ.네. 알겠습니다.."
"어휴 씨발새끼 진짜"
김철기 상경은 판초우의 두 벌을 밖으로 내던지고는 상황대기실 문을 거칠게 닫았다
김정민 일경은 판초우의를 주섬주섬 주워들더니 김성호 이경이 있는 곳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달려왔다
여전히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콰릉- 콰르릉-
툭...투둑...툭..툭..툭..툭.툭.툭툭툭툭 투ㅌㅌㅌㅌㅌ 솨아아-------
순식간에 차가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ㅅ.성호야! 이..이거 입어."
"이경 김성호! 네. 알겠습니다!"
둘은 주섬주섬 판초우의를 입고는 차가운 비를 맞으며 참호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간부들의 거점 순시가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호야 ㅁ미안..ㄴ.내가 조..좀만 더 자..잘했으면 펴..편하게 그그..근무 ㅅ..서는데.."
"아닙니다."
둘은 얼마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다를 응시했다
4월 중순의 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곧 은근한 한기가 두 명의 몸을 감쌌다
"ㅅ.성호야. 여기 자..잠깐 있어..ㅌ..탐조등 도.돌리고 올게.."
"이경 김성호. 소대장님께서 웬만하면 돌리지 말라고 하신거 아닌지 알고싶습니다"
"...기..김철기 ㅅ상경님이 도..돌리래..그.금방 갔다올게.."
"저도 같이 가도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냐..호..혼자 가도 돼.. ㄱ금방 갔다올게..이..여기서 기.기다리고 있어.."
김성호 일경은 급한 발걸음으로 탐조등 쪽으로 향했다
번쩍!.... 콰르르르르릉----- 쿠궁---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사방이 온통 빗소리와 천둥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주변은 사라봉에 막 도착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싸늘함과 기분나쁜 한기가 김성호 이경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김성호 이경의 머릿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근무시간이 빨리 지나서 초소로 복귀하여, 물기를 닦아내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단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달콤한 생각에 잠겨 헤어나오지 못하던 김성호 이경은 문뜩 탐조등 조명이 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김성호 이경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왜 안오시지?...김철기 상경한테 말해야되나?..아..춥다..'
얼마간을 더 참호 속에 머물던 김성호 이경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참호 밖으로 나온 그는 탐조등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번쩍!...... 꽈과과과광---!!!!!!!..
"으어어어!!!........"
김성호 이경은 순간 얼어붙었다
하늘은 분노한 듯이 사정없이 천둥번개와 비를 내리고 있었다
김성호 이경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상황대기실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솨아아아아아------------
비는 더욱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일순간이었지만 김성호 이경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뭐가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동굴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벗어나 당장이라도 상황대기실을 향해 달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탐조등으로 가봐야 돼..김정민 일경님이 거기 있을거야..'
김성호 이경은 다시 탐조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탐조등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김성호 이경은 탐조등으로 가는 발판이 부숴져 철근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보았다
김성호 이경은 부숴진 발판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김성호 이경은 휴대용 탐조등을 철근 사이로 비췄다
무겁고 차가워보이는 철근 사이 저 아래로 익숙한 군복이 엎드린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김성호 이경은 떨리는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대로 땅에 주저 앉고 싶었지만 방법을 까먹은 듯 했다
그는 절망으로 차오른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꾸르릉--- 솨아아아아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차가운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7
솨아아아아아아---------- 끼익-- 철컥!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후우..."
"......."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어쩐지 어제 거점갈 때 느낌이 쎄~ 하더만.."
소대장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철기 상경 앞으로 소대장이 왔다갔다 하며 입을 열었다
"철기야"
"상경 김철기!"
"..진짜 별일 없었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소대장이 널 못믿어서가 아니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탈이 안나요~"
"..예 알겠습니다"
"곧 단에서 진상조사차 올거다~"
"......."
"우리 철기가 그랬을리는 없지만 혹시나 해서.. 정민이 진짜 혼자 근무서다가 발 헛디딘거 맞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이 소대장은 철기만 믿고 간다"
"예 알겠습니다..저 근데 소대장님"
"저랑 김성호 이경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별일 없을거다. 그냥 거점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얘기하면 돼"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잘 마무리 되면 기율이나 영창14박15일 선에서 끝날거다.." (기율 = 군기교육대)
"예..알겠습니다.."
"대대장부터 중대장 포함 중대 간부들, 나, 부소대장까지 줄줄이 징계먹을거다. 그나마 중대장님이 단에 연이 좀 있어서 망정이지...어후..."
"..예 알겠습니다"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소대장은 의외로 의연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차분하게 행동했다
"그래..가봐.."
소대장은 김철기를 소대장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듯 낮은 톤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김철기 상경은 심장이 뛰었다
100m 달리기 시합의 출발선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릴 때의 묘한 긴장감이 몸에서 떨쳐지질 않았다
'....내가 그 새끼를 밀기를 했어 뭘했어. 난 잘못한거 없다. 그 새끼 혼자 굴러 떨어진거지..'
김철기 상경이 속으로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되뇌이고 있을 때 저만치 김성호 이경이 소대장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김철기 상경은 김성호 이경을 보자 심장이 크게 가라앉았다
"야 김성호!"
김철기 상경이 낮은 톤으로 힘주어 김성호 이경을 불렀다
"이경 김성호!"
"아까 내가 한 말 다 기억나지?"
"...예 그렇습니다."
"...실수하지 마라. 실수하는 순간 넌 나랑 감옥에서 사는거야 거의 평생.."
"...김철기 상경님"
"왜?"
"그냥 사실대로.."
"이 씨빨새끼가 아까 내 말 뭘로 들었어 씨발놈아. 이 개새기까 보자보자 하니까"
김철기는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작고 낮은 목소리로 김성호 이경을 쏘아붙였다
"잘들어. 소대장님, 중대장님 모두 이 일 크게 안 벌이고 덮고 가실 것 같으니까 괜히 지푸라기에 불 붙이지 마라! 알아 들어?"
"...예..알겠습니다."
"...성호야.."
"이경 김성호?"
"부탁이다. 이번 한번만 이대로 넘어가자. 내가 니 남은 군생활 편하게 해줄게. 응?"
"........"
"하나...진짜... 후우..."
"김철기 상경님.. 저 너무 무섭습니다.."
"......."
"너무 무서워서 잠도 제대로 못잘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래 임마.. 나도 무섭고 그래. 근데 어쩌겠냐.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걔가 혼자 굴러 떨어진거지 우리가 밀기라도 했냐?"
"아닙니다..."
"그래 임마!..우린 잘못 없다고. 거점에서 소대장이 주의를 줬으면 지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안그래?"
"...그렇습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마라. 다 잘 될거니까.. 소대장 앞에서 실수만 하지마.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
김철기 상경은 몇 번을 더 주의를 주고는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김성호 이경은 김철기 상경의 뒷보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소대장실 문을 열었다
8
"하..진짜 오랜만이네..씨발.."
"상경 때 이후로 처음 오신거지 말임다."
"......"
"이왕 오신거 편히 계십쇼. 막내들 근무 세우겠슴다"
"됐고. 나랑 경계근무나 서자"
"..알겠슴다. 무전기 주십쇼. 제가 둘다 차고 있겠슴다"
4월 중순의 밤은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가웠다
하늘에는 여전히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박혀있었고, 차가운 배 한척도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한참 하늘을 바라보던 김철기 수경은 말없이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는 하나를 더 꺼내서 김성호 상경에게 건냈다
김성호 상경은 김철기 수경이 주는 담배를 받아 물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김철기 수경의 담배에 불을 붙혔다
"뻑!..후......"
"뻐어어어억!... 후우우....."
"미친새끼 한번에 담배 다 피냐 큭큭큭"
"습관이지 말임다 큭큭...그냥..이렇게 피면 속 안에 있던게 후련하게 날아가는 것 같아서 좋슴다"
"그래? ... 뻐어어어어엌!..!! 켁! 케헤헤헤헿헥! 케흙! 켉! 커헉! 컥...스읍~ 에취히!~ 꿀꺽..음냐...하아.. 이 씨빠~알 켉!"
"큭큭큭큭큭 그거 급하게 마시면 그리 됩니다 큭큭큭 천천히 연기가 목 안긁게 조절하면서 들이마셔야 하지 말임다 큭큭큭큭"
"속에 있는거 다 나오네. 눈물이랑 콧물까지 씨발 큭큭 에취!"
"큭큭..이제 김철기 수경님 나가시면 저 누구랑 노는지 말임다"
"야 뭔 수경님이냐. 이제 말 놔. 너 나랑 동갑이잖아"
"에이~ 한번 고참은 계속 고참이지 말임다"
"지랄한다 큭큭 농담 아니고 말 편하게 해 이제..윗사람 대접 깍듯이 받는 것도 군내에서나지 밖에 나가면.."
"...아닙니다.. 그냥 원래 호칭으로 부르겠슴다. 그게 더 편할 것 같슴다"
"...그러던가 말던가.."
"......."
"이제 여기도 끝이구나~ 씨~이~바~아~알~~~~~~"
"후련하시겠슴다"
"후련한데... 막상 또 그렇게 좋지는 않은데..그냥 좆같다.."
"그런게 어딨는지 말임다 옆에 아직 군생활 한참 남은 사람도 있는데.."
"너도 나중에 전역할 때 돼 봐라.. 좋은데 좋은게 아닌 좆같은 기분이다"
"그런 기분 느껴도 좋으니까 빨리 전역이나 하고 싶지 말임다"
"큭큭큭 니 전역하는 날이 올 것 같냐? 큭큭"
"왜그러시는지 말임다~ 지금도 국방부의 시계는 흘러가고 있지 말임다"
"그지 흘러가지 아주 천천히? 큭큭큭 야 글고 우리가 군인이냐? 우리 군인 아냐~"
"군인 되려고 입대한건 맞지 말임다 큭큭. 여기로 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니까. 하필 와도 좆같은 곳으로 와서는 씨발..제주도가 아니라 저주도다 저주도"
"...김철기 수경님"
"응?"
"그 날 일 아직 못잊으신거 맞지 말임다"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냐..잊고 싶은데 좆같이 안잊혀진다"
"...김정민 일경한테는 안 미안하신지 말임다"
"...그게 뭔소리냐? 내가 왜 미안해야 되냐?"
"...아닙니다.."
"아니 내가 밀어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지가 혼자 굴러 떨어진건데 내가 왜 미안해 해야되냐? 너 말이 좀 이상하다?"
"...솔직히 그 때 김철기 수경님이 김정민 일경 갈구고 얼차려 주신거 아닌지 말임다.."
" 이 새끼가 뭔 헛소리 하고 있어. 니가 봤어? 내가 김정민이 얼차려 주는거 니가 봤냐고"
"..아닙니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뭔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어 씨발 기분 좆같게"
"...김정민 일경 다리 후들거리는거 봤지 말임다..무서워서 떨리는게 아니라 근육 피로로 조금씩 경련 일어나는 거였지 말임다"
"하나.. 이 씨발 진짜.. 그래 내가 기합좀 줬다. 하도 좆같게 말 못 알아들어 쳐먹길래 얼차려 좀 줬다. 그것 땜에 김정민이가 빡쳐서 뛰어내렸다고?"
"...빡쳐서 그런게 아니라.. 다리가 후들거려서 낡은 발판 부숴졌을 때 그대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거 아닌지 말임다"
"야!!!"
"그리고 그 날 소대장님이 탐조등 돌리지 말라고 했는데 김철기 수경님이 돌리라고 시킨거 아닌지 말임다!"
"이 씹새끼가!! 증거 있어? 걔가 나땜에 죽었다는 증거 있냐고 이 씨발년아!!!! 너 갑자기 왜이러냐? 이제 갈사람이라서 막 그래? 어?"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하루도 편해본 적이 없었슴다...적어도 김정민 일경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어야 되는거 아닙니까?"
"이 씨빨 개새끼가!!!!!!"
김철기 수경은 한 손으로 김성호 상경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그 순간 김성호 상경의 휴대용 무전기가 소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중대에서 거점 근무자 확인합니다-칙-
화북거점- 응답바람- 칙-
화북 일경 김상철외 4명 근무 중- 칙-
화북거점 확인 완료- 칙-
상황대기실의 후임이 능숙하게 무전을 받았다
김철기 수경이 다시 말을 이어가려 할 찰나에 다시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치이----익!...칙...치직
날씨는 분명 맑았다. 새벽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있었지만 아직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러나 무전기는 살에 깊이 박힌 가느다란 가시의 끝을 잡아 뽑아낼 때처럼 겨우 신호를 잡아내고 있었다
중대로부터의 거점 확인은 화북이 마지막이지만 가끔 단에서 중대나 무작위 거점으로 근무자 확인 무전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김철기 수경은 개의치 않고 김성호 상경에게 눈을 부라리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치직...지이-----익! 지직!.. 치이....끼이이이이이잉!!!!!
순간 날카로운 금속끼리 강하게 부딪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던 김철기 수경과 김성호 상경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잠깐동안 정적을 유지하던 무전기는 다시 힘겹게 무전을 내뱉기 시작했다
..치직..중대에서.. 근ㅁ자 확ㅇ-..칙- 사ㄹ..봉 응답ㅂ..람.- 칙-
"????????"
"!!!!!!!!"
김철기 수경과 김성호 상경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라봉 치익-.. 일경..김...정...민.. 근무 중.. 칙-
9
뭔가 잘못되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둘 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먼저 정신을 차린 김철기 수경이 다급히 상황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방금 사라봉 무전 누구야!"
"일경 김상철? 사라봉 말씀이십니까?"
"그래 새끼야. 너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싶습니다?"
"방금 사라봉이라고 무전 받은 새끼 누구냐고!!!!"
"김철기 수경님! 방금 무전에 사라봉은 없었습니다!"
"뭐?"
"방금 화북으로 무전와서 무전 받은게 전부였습니다"
순간 김철기 수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황대기실에 있는 김상철 일경과 다른 후임들은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김철기 수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니네 진짜야?"
"예.그렇습니다. 사라봉 거점 1년 전에 폐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김철기 수경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내선 수화기를 들었다
"중대. 여기 화북인데, 방금 사라봉 무전 누구냐?"
"사라봉 무전 말씀이십니까?"
"그래 씨발 어떤 새끼냐고!!!!"
"저희 사라봉 무전 안쳤는데 말임다?"
"이 씨발 방금 내가 휴대용 무전기로 똑똑히 들었는데 구라 칠래?"
"자꾸 무슨 소리신지 말임다. 저희 사라봉 무전 안쳤슴다. 왜 그러시는지 말임다?"
"놀리지 마라! 내가 방금 들었다고 사라봉 무전"
"잘못들으신거 아닌지 말임다~ 저희 진짜 무전 안쳤슴다. 사라봉 폐쇄된지가 언젠데 무전을 왜 칩니까?"
"내가 방금 들었다니까!!"
"듣긴 뭘 듣습니까 진짜! 아 좀 믿으십쇼! 속고만 사셨슴까? 사라봉 무전 안쳤슴다! 거기 상황대기실에 있는 애들한테 함 물어보시지 말임다~(하~ 진짜 왜 이래. 곧 전역하는 새끼가 좆같게 시발)"
수화기 너머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김철기 수경은 분명히 들었다. 김성호 상경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분명 들었는데 무전을 안쳤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말이 안된다
머릿 속이 혼란스러워진 김철기 수경은 허공을 응시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급히 김성호 상경에게로 달려갔다
"김성호 넌 들었지"
"......"
"같이 들었잖아!!!!"
"...아닙니다..."
"???? 이 새끼가 내가 너 표정 굳는거 다 봤는데 뭐??"
"..사라봉에서 무전이 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씨발..흐흑"
"...이 씨발..너도 들은거 맞지? ... 하..씨발.."
김성호 상경은 상황대기실 후임들을 의식했는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쿠궁- 쿠구구궁-
하늘 멀리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철기 수경님. 김성호 상경님! 곧 비올 것 같지 말임다! 저희가 근무 서겠슴다!"
상황대기실로부터 김상철 일경의 소리가 들려왔다
김성호 상경은 재빨리 눈물을 닦고 호흡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쿠구구구구궁-.. 번쩍!.........꽈과과광!!!!!!.....툭...투둑..툭..툭..툭.툭.툭.툭 솨아아아아------
차가운 비가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 놓은 듯 마구 쏟아졌다
그 날을 생각나게 하는 빗줄기와 온도였다
"야 김성호"
"......"
"대답 좀 해줘라 성호야..제발.."
김철기 수경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김성호 상경을 불렀다
김성호 상경은 김철기 수경의 불안과 절망에 가득찬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예.."
"김정민 죽은거 맞잖아? 그 때 엠뷸런스 실려갔잖아 그치?"
"..그렇슴다.."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김정민이 죽은 곳..절벽의 높이와 자갈밭.. 다시 한번 봐야겠어. 그래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가자.."
"......"
"제발..제발 한번만 가주면 안되겠냐? 나를 위하는게 아니라 김정민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그 날 일을 속죄한다고 생각하자. 부탁이다 성호야.."
"...후우..."
김성호 상경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날 이후 단 하루도 맘편히 지내본 적이 없는 김성호 상경이었다
그런 김성호 상경을 김철기 수경은 그 날의 현장에 가서 그 날 일을 사죄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김정민 일경에게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사실은 김철기 수경 본인이 마음 속 응어리를 털어내기 위한 것임을 김성호 상경은 알고 있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알겠슴다.."
둘은 화북거점의 탐조등을 지나 허리까지 무성히 자란 잡초밭 사이로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진흙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둘은 아무말없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제주항으로부터 새어나오는 영롱한 불빛이 점점 둘을 감싸 안았다
마치 꿈속에서 물에 둥둥 떠있는 느낌
주변을 가득 메운 빗소리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꿈속을 걷고 있을 쯤 시야에 들어온 자갈밭이 빗소리의 볼륨을 순식간에 크게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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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기 수경과 김성호 상경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건너 자갈밭에 도착했다
자갈밭 뒤로는 20m 쯤 되보이는 절벽이 높게 치솟아 있었다
김철기 수경은 절벽의 끝을 올려다 보았다
굵은 빗줄기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올려다 보았다
김성호 상경은 그런 김철기 수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살 수 없다. 말이 안된다. 죽은게 확실하다'
김철기 수경은 확신에 차오르는, 좀 더 정확히는 확신으로 채워가는 표정으로 한참을 절벽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말했어야 합니다"
김성호 상경이 빗소리를 깨고 입을 열었다
"야 김성호"
"......."
"...후.. 그래 사실만 따져보자"
"......."
"김정민이 탐조등을 돌리러 갔지. 소대장이 돌리지 말라고 했지만 FM대로라면 전혀 문제 없었다. 돌려야 맞는 거라고"
"......."
"김정민이 탐조등을 돌리러 갔고, 낡은 발판 때문에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김정민 죽는데 뭐 잘못한거 있냐?"
"기합 주셨지 말임다.. 그거 아녔음 발 헛디디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러면.."
"씨발 그래 기합 줬다. 그래서 뭐? 그럼 기합 준걸로 처벌 받지 뭐. 내가 직접 김정민을 죽였냐? 내가 밀었냐고 이 병신새끼야!!!!"
"적어도 미안한 마음은 갖고 있어야 되는거 아니냐고 이.. 이 개 씨발새끼야!!!!!"
김성호 상경은 시뻘개진 눈으로 김철기 수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거의 흐르기 직전이었다
김철기 수경은 순간 놀랐는지 약간 수그러든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 미안해 미안하다고! 미안해하고 있다고 씨발. 뭘 더 어떻게 해야되냐 내가? 엉? 내가 뭘 더 어떻게 해? 씨발 여기서 대성통곡이라도 해야되냐? 별 갖잖은 소리하고 있어 병신같은 새끼가"
"넌 진짜.. 내가 본 인간 중에 최악이다. 이 개쓰레기새끼야..으흑흑.."
"하 이런 상병신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야이 씨발년아. 내가 니 친구냐? 이 좆같은 새끼가 존나 오냐오냐 해주니까 개쳐맞먹네 병신년이"
치직- 치지직- 치직-
김철기 수경이 김성호 상경을 노려보며 가까이 가는 순간 김성호 상경의 휴대용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치직- 야 성호야 나 부대장인데 니네 어디있냐? 화북 순시왔더니 대기실에 왜 니들 둘만 없어?"
순간 김성호 상경은 당황하여 어떤 내용으로 무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김철기 수경이 김성호 상경의 손에 들린 휴대용 무전기를 낚아채 무전을 이어갔다
"치직- 부소대장님 김철기 수경입니다. 대기시간에 잠시 바다 보러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치직- 너네 무슨 일 있냐? 뭐 사고 치고 그런거 아니지?"
"치직- 아닙니다. 아무 일 없슴다. 바로 가겠슴다. 죄송합니다."
"치직- 지금 상황대기실에 있으니까 빨리 와라."
"치직- 알겠슴다."
김철기 수경과 김성호 상경은 서로에게 고조된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화북거점을 향해 최대한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소대장의 순시라니
발령 초반이라 근무 돌아가는 것도 익힐겸 순시를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김철기 수경은 거점을 향해 계속 달렸다
"충성!"
"야 철기야 근무 중에 어디 갔다오냐?"
"죄송합니다. 그냥 바다 좀 보고 왔습니다.."
부소대장은 아까와는 다르게 무거운 표정으로 김철기 수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뭐 사고친거 아니지?"
"네. 그렇슴다"
"그래.. 근데 방금 상황실 애들 얘기 들어보니까 너 사라봉에서 무전왔었다고 했었다며?"
"어...그게...제가 잘못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근데 중대에까지 전화해서 확인했다던데. 뭔일 있었어?"
"아님다. 제가 오랜만에 거점 나와서 그런지 타소대 무전 소리를 착각한 것 같슴다. 죄송합니다"
"그래?...확실해?.."
"네. 그렇슴다"
부소대장은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부소대장은 김철기 수경의 눈을 계속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철기야. 내가 여기 발령받은지 얼마 안됐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면 안돼"
"......"
"너 전역 얼마 안남은거 알지만 사실대로 말해줘야한다. 그래야 내가 확인이라도 하고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하고 그러지. 사라봉 무전 들었어 안들었어?"
"......."
"김성호!"
"상경 김성호!"
"너 철기랑 같이 근무 섰지?"
"네. 그렇슴다"
"사라봉 무전 들은거 있어?"
"...사실..들었슴다"
순간 김철기 수경은 김성호 상경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곧 부소대장의 시선을 의식한 듯 눈에 힘을 빼고 부소대장을 바라보았다
"철기야. 나도 소대장님께 대충 들었다. 너 사라봉에서 성호랑 일 있었던거"
"......."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들었어 안들었어?"
"...들었슴다"
"확실해?"
"예.. 확실히 사라봉이라고 무전 왔었슴다"
"근무자가 누구라고 무전 왔어?"
"그게..."
"괜찮아 다 말해봐"
"...김정민 일경이라고 했슴다.. 저 근데 부소대장님 아무래도 누가 장난친 것 같슴다. 김정민 일경 죽었는데 무전 왔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사라봉에서 죽은 김정민 일경한테 무전이 왔다라... 말이 안되는데.."
"........"
"일단 알겠다. 내가 사라봉 가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어. 가서 거기 누가 진짜 있는 건지 단순히 무전으로 장난친건지 확인 좀 해봐야겠다"
"....저도 같이 가면 안되겠습니까 부소대장님.."
순간 부소대장은 다시 표정이 어두워지며 고민하는 듯 했지만, 이내 김철기 수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철기도 같이 가자. 안그래도 지금 답답할거 아냐? 가서 직접 확인하면 좀 나아지겠지. 성호도 같이 가자?"
"상경 김성호...예 알겠슴다.."
김철기 수경, 김성호 상경, 그리고 부소대장은 부소대장의 개인 차량에 올라탔다
하늘은 비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분노한 듯 천둥번개와 함께 세차게 비를 퍼붓고 있었다
집의 따뜻한 이불과 차 한잔이 그리워지는 날씨에 세 사람은 사라봉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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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대장님.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셔야합니다"
기우뚱거리던 차가 이내 멈춰섰다
주변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아래로 제주항의 영롱한 불빛만이 플라이아데스성단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판초우의 챙겨왔으니까 안에서 입고 내려"
부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김철기 수경과 김성호 상경은 주섬주섬 판초우의를 입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ㅏㅏㅏㅏ---------
"쏟아 붓는구만 아주. 니네들 예전에 여기서 근무 어떻게 섰냐..나 같았으면 절대 못섰을거다 큭큭"
부소대장이 정적을 깨며 말했다
"내려서 상황대기실이랑 근처 빠르게 둘러보고 오자"
"예.알겠슴다"
셋은 차에서 내린 뒤 일렬로 사라봉 거점을 향해 걸었다
사라봉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
거점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밀려들어왔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막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을 즈음
10m 정도 눈앞에 사라봉 거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탐조등 쪽 가볼테니까 철기랑 성호는 상황대기실이랑 그 주변 살펴보고 있어"
"상경 김성호. 부소대장님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괜찮아.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주변 훑어보고 있어. 조심하고"
부소대장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탐조등 쪽으로 사라졌다
김철기 수경은 김성호 상경을 어색하게 쳐다본 뒤 상황대기실 문을 열었다
득..드륵...드르르르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미닫이 나무문이 힘겹게 열리며 내부 공기를 토해냈다
비오는 날 나무로 만든 마루에서 맡을 수 있는 썩은 듯 아닌 듯 한 사람 기름에 버무려진 나무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김철기 수경은 손전등으로 상황대기실 내부를 비췄다
1평 남짓한 상황대기실 안에는 나무로 된 낡은 책상 하나와 나무의자가 그대로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철기 수경은 책상과 의자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상황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김성호 상경은 김철기 수경을 뒤따라갔다
둘은 상황대기실 주변을 훑었다
손전등으로 여기저기 비춰봤지만 빗줄기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보고 있을 때 김성호 상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소대장님 아직 안오셨지 말임다"
"......."
"아까 금방 오신다고 하셨는데..지금 40분 째 안오고 계십니다"
"어쩌라고"
"......."
".. 에이 씨발.."
김철기 수경은 아직 화가 덜 풀린듯 한 표정으로 김성호 상경에게 눈을 흘기고는 상황대기실 쪽으로 걸어갔다
"...맘대로 하십쇼! 저 혼자 가겠슴다"
김성호 상경은 나지막하게 말을 던지고는 탐조등으로 향했다
"저런 씨이발 새끼가...쳐 뒤질라고 진짜.."
김철기 수경은 김성호 상경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씨발 어떤 개새끼가 장난쳤는지 찾아서 죽여버린다..후..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네 씨발.."
김철기 수경은 처음 상황대기실 문을 열었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라봉에서는 절대 무전이 날아 올 수 없고 중대 내 누군가가 장난친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대로 복귀해서 누가 장난쳤는지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던 김철기 수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호 상경과 헤어진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김철기 수경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야 시발.."
콰르릉-- 콰광!!! 솨아아아아----
"씨빨! 깜짝아!!..후우...후우....뭐야...거기 씨발 뭐야!"
번개가 치는 순간 저 멀리 방탄헬멧을 쓰고 판초우의를 걸친 사람 한명이 김철기 수경의 시야에 스쳐지나갔다
번개가 사그라들자 그 사람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야 김성호! 너 거기서 뭐해 시발! 부소대장님은?"
김철기 수경은 사람을 본 쪽을 향해 손전등을 밝히며 소리쳤지만 빗줄기와 비소리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씨빨!!!!!!!!!!!"
밤바다 한 가운데에 혼자 빠진 것처럼 공포가 김철기 수경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김철기 수경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탐조등 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부소대장님!!!!! 야 김성호!!!!!!!!"
그 순간 탐조등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빗소리에 가려 크게 들리진 않았지만 군화가 얕은 물 웅덩이에 빠졌을 때 나는 찰박한 소리가 김철기 수경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김철기 수경은 직감적으로 김성호 상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어느 정도 공포감에서 해방된 듯 있는 힘껏 탐조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탐조등이 가까워 질 수록 김철기 수경의 마음에는 점점 안도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살짝 쪽팔림을 느낄 즈음 방탄헬멧을 쓰고 판초우의를 입은 사람이 김철기 수경의 시야에 들어왔다
탐조등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후우...김성호..부소대장님은.. 부소대장님 어디 계시냐?!!"
반가움과 어색함 그리고 조금 남아있는 공포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을 뱉으며 손전등을 비춘 김철기 수경은 곧 온 몸이 얼어버렸다
김철기 수경의 손전등에서 뻗어나간 빛줄기는 희미하게 '17'이라고 적힌 방탄헬멧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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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꽈과과광!!!!!! 솨아아아아아아----
잠시나마 사라봉 전체를 환하게 비출 정도의 거센 천둥번개가 하늘에서 요동쳤다
번개가 내리 쬐는 새파란 빛은 방탄헬멧에 적힌 숫자가 17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김철기 수경은 이질적인 상황에 놓인 듯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흔히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드리면 순간 몸과 마음이 굳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김철기 수경이 그러한 상태였다
17은 김정민의 석순이었다
김정민 일경은 약 1년전 사라봉에서 죽었다
방탄헬멧은 튕겨져 나갔는지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앞에 누군가 17이라고 적힌 방탄헬멧을 쓰고 있다
죽은 김정민 일경이 살아 돌아왔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숫자 17이 적힌 방탄헬멧을 새로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 누군가 쓰고 있는 방탄헬멧은 김정민이 썼던 방탄헬멧처럼 숫자 17에 3개의 큰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17 옆에 하얀 실밥으로 무엇인가 적혀있었다
김정민 일경의 방탄이 그랬었다
방탄헬멧 자체도 새 것이 아니었다
'뭐지?....."
김철기 수경은 손전등을 좀 더 낮춰 방탄헬멧 아래쪽을 비추었다
누군가의 뒤통수 아랫부분과 목이 보였다
"......김성호?"
"......."
뒤돌아 있는 존재는 미동도 하지않고 그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왼손에는 휴대용 무전기를 쥐고, 오른손에는 K2 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야 김성호!! 대답좀 해!"
김철기 수경은 김성호 상경일 것이라고 확신한 듯 소리쳤다
아니 반드시 김성호 상경과 부소대장님 둘 중 하나여야 했다
그게 아니면 앞에 있는 존재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부소대장님? 김성호? 아 대답좀 해보십쇼!!!"
그 순간 뒤돌아선채 있던 누군가가 왼손에 쥐고 있던 휴대용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치직-- 치지직--
김철기 수경의 무전기가 소리를 밷어냈다
치직-- 사라봉거점.. 일경 김정민 외 두명 근무중.. 치직---
김철기 수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곤 어느 때 보다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씨발 말도안돼! 너 어떤새끼야!"
김철기 수경이 다가가려는 순간 뒤 돌아선 존재는 탐조등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개새끼 잡히면 죽여버린다!!!!"
김철기 수경은 악에 받친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탐조등 앞에 다다르자 빠르게 달리던 존재는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들고 있던 총의 개머리판으로 뒤쫓아오던 김철기 수경의 머리를 있는 힘껏 찍었다
탁!!!!
"으아아아악!!"
김철기 수경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진흙탕에 널부러졌다
이마에서는 피가 고였다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 피는 흘러내리기도 전에 빗물에 씻겨 흩어지고 있었다
"으아... 너 누구야 ...누구야!!!"
김철기 수경은 밤바다 한가운데서 몸을 휘적거리듯이 몸부림치며 절규하고 있었다
"정민이냐?..정민이 아니잖아! 그 새끼 죽었는데!!!!..너 누구야! 누군데 이런 개 좆같은 장난..."
퍽!!
"아악!!. 커헉.."
"정민이도 이렇게 아팠겠지.."
"?!?!"
"놀라는 척 하지마라. 이제 시작이니까. 넌 양심이란게 없는 짐승이잖아"
꽈과광-!!!!!
또 다시 천둥번개가 사라봉을 밝혔다
그 찰나의 순간 김철기 수경은 똑똑히 보았다
".....부소대장님?"
"...내가 왜 니 부소대장이야 이 짐승새끼야"
"부소대장님 맞지 않슴까? 왜 이러시는지 말임다!"
"입 다물어 짐승새끼야"
퍽!.. 퍽!...
"으헉...헉헉...부소대장ㄴ 컭!...으으... 잠시ㅁ... 으아악!!"
김철기 수경은 아픔 때문인지 답답함 때문인지 소리를 질러댔지만 모두 빗소리에 먹혀 들리지 않았다
맞으면서 김철기 수경은 부소대장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 날 일은 분명 김성호 상경과 김철기 수경 자신 밖에 모른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김성호 상경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본인도 처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말했을리는 없을 것이었다
부소대장은 김철기 수경을 한참 동안이나 때린 후 입을 열었다
"우리 정민이도 이렇게 아팠을건데 그치?"
"..그게 ㅁ무슨 말씀..이심까.."
"너 우리 정민이 때렸잖아..1년 전에 여기서.. 기억안나?"
"......."
"뺨을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며!! 기억 안나??? 엉???"
부소대장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정민이 걔가...흐윽...걔가 좀 모자라긴 해도...흑.. 얼마나 착한 애였는데..너 같은 짐승새끼 때문에...너 같이 양심 없는 개새끼 때문에!!!!"
그제서야 김철기 수경은 부소대장이 김정민 일경의 사촌이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철기 수경은 피가 흐르는 입으로 꾸역꾸역 말을 내뱉었다
"ㅈ..제가..안...안죽였슴다아..."
"하하...그래... 니가 직접 죽인 건 아니지 흐흐...프흐흐흐흐흐..."
부소대장은 실성한 듯 잠시 동안 웃어대더니 말을 이어갔다
"니가 그날 정민이를 때리지만 않았어도...아니!..탐조등을 돌리게 하지만 않았어도...으흑흑..."
"........"
"흐흐...됐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죽인 사람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그치? 으흐흐"
"...ㅈ..잘못..했슴다.."
"프흐흐흐흐흐흐흐 니가 잘못한 줄은 아냐? 크흐흐흐 어헑! 케헭! 콜록 콜록...꿀꺽...휴우......다 필요없고! 우리 정민이 외롭지 않게 니가 친구나 해줘야겠다"
"...??....."
부소대장은 김철기 수경 배 위에 올라타서는 김철기 수경의 목을 있는 힘껏 조르기 시작했다
김철기 수경은 저항하고 싶었지만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말만 겨우 내뱉을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있는 힘껏 바둥거렸지만 점점 눈 앞이 노래지며 시야가 흐릿해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김철기 수경의 눈이 뒤집어 까져 검은자위가 점점 사라져가는 순간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꺼흐으으으으으~ 케헥!!!켁 켁 쿨럭. 으헑. 켈룩 케헭 켉 켉 커흙....꿀꺽.음냐. 케헥 켁..흐으으으읍.. 케~헥!!! 꿀꺽. 끄어어!!!"
김철기 수경은 가까스로 숨을 쉰 후 필사적으로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부소대장님!!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셨잖슴까!!"
김성호 상경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김성호! 이게 뭐하는 짓이야!!"
"부소대장님.. 정신 차리십쇼! 죽이시면 안됩니다!!"
"왜 안되는데!!! 정민이는 되고 이 새끼는 안되냐?"
"죽이면 똑같은 사람 밖에 안됩니다. 김정민 일경 죽은 것은 정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입 다물어 새끼야!! 니가 뭘 알아!! 정민이 죽을 때...총이 몸에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을 때!! 넌 뭐했어? 뭐했냐고!!.. 너도 똑같은 놈이야 이 개새끼야!!"
부소대장은 옆에 널부러진 총을 집어들었다
철컥-!
"부소대장님?"
"비켜 김성호.. 이 새끼만 죽일거니까. 막으면 너도 죽인다"
"부소대장님!!!!!!!"
"비키라고 씨발새끼야!!!!!"
타앙-!
격발 소리가 날카롭게 빗줄기 사이를 뚫고 퍼져나갔다
"첫 발만이다. 지금부터는 빗맞힐 생각 없어.. 비켜.."
"부소대장님..으흑...제발.. 이러시면 안됩니다 으흐흑"
"비키라고!! 이 새끼야!!!!!!"
부소대장의 총구가 김성호 상경을 향하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떤 김철기 수경이 있는 힘껏 부소대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타앙--!
두 번째 총알이 빗소리를 갈랐다
번쩍!!! 꽈과광!!!! 꽈르릉!!!
"야 김성호!!! 빨리 총 뺏어!!"
부소대장과 엉켜 뒹굴며 다급하게 소리지르는 김철기 수경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김성호 수경은 부소대장의 총을 향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타앙---!
세 번째 총소리가 사라봉에 울려 퍼졌다
"으어어어어어어!!!!"
"???? 김철기 수경님!!!!"
"꺼흐으으윽!! 야이 병신새끼야! 빨리 총 뺏어!!!!!!!"
김철기 수경은 피가 흘러내리는 손으로 부소대장의 팔을 부여잡고는 온몸으로 그를 저지하고 있었다
김성호 상경은 있는 힘을 다해 부소대장의 총을 낚아챘다
부소대장은 총을 뺏기자 단단히 화가난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김철기 수경을 떼어내려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너!...이 개새..끼들!..너네 다..죽여버릴..꺼다!!!"
부소대장이 안간힘을 쓰며 김철기 수경을 밀어내려는 찰나 김성호 상경이 부소대장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그만 좀 하십쇼!!!"
"좆까..는... 소리...하지....말라고오오!!!!!!!!!"
"으아아아아아아!!!!!!!"
꽈과과과광!!!!!
끼이이이이이이-----
"????????"
"어?.. 어?"
"아...으아아아아악!!!!"
...퍽!!....
부소대장과 김철기 수경이 서로에게 있는 힘을 쏟아 붓는 순간 탐조등으로 향하는 낡은 발판을 받치던 철근이 무너져 내렸다
서로 얽힌 셋은 곧바로 20m 아래 자갈밭을 향해 자유낙하 한 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운동을 멈췄다
솨아아아아아아----------
검붉은 진한 액체가 빗물에 희석되어 자갈밭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다 지우려는 듯이 거세게 빗줄기를 쏟아 붓고 있었다
사라봉 아래 저 멀리 보이는 등대가 말없이 비가 쏟아지는 검은 밤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13
"성호야.."
"이경 김성호!.."
"...정민이 정말 아무일 없었던 것 맞지?"
"...네 그렇습니다.."
"...성호야..."
"이경..김..성호.."
"넌 아무 잘못 없다. 다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나에게 말해줘야 돼..그게 정민이를 돕는거야.."
"......."
"...자갈밭에 구석에 정민이 방탄헬멧 있더라.."
"?"
"그런데 그 방탄에... 병신..이라고 누가 바느질로 하얗게 글씨를 써 놨더라고.."
"!!.."
"우리 정민이...내 조카..말이 좀 어눌하고 어리버리 하긴 하지만 정말 착한 애였는데..."
"....."
"소대 내에서 괴롭힘이나 그런거 없었던거 맞지?"
"...네...그렇습니다..."
"....후우.... 그래 알겠다.. 면회 시간 다 됐네. 마저 먹고 나와라. 먼저 간다"
"저...경장님!" (경장 = 순경 바로 위 계급. 부소대장을 할 수 있는 계급이다. 소대장은 경사 = 경장 바로 위 계급)
"응?"
"실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4
"오늘부터 우리 소대에서 근무하시게 될 부소대장님이시다~ 인사 드려~"
"소대 차렷! 부소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충성! 바로!"
"바로!!"
"캬~! 역시 우리 철기~ 손 베이겠다 베이겠어~. 얘가 김철기라고 우리 소대 에이스. 곧 전역하는 놈인데 이 놈만한 애가 없어 큰일이야~"
"...반갑다! 김철기! 부소대장이다!"
"수경 김철기! 반갑습니다!부소대장님!"
"그래 육지에서 오셨으니까~ 여기 업무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실거다~..어디보자~...누가 좋을까...그래. 김성호!"
"!!..상경! 김성호!"
"그래. 너랑 철기가 부소대장님 업무 파악하는데 도움 좀 많이 드려라~"
"..예!.. 알겠습니다!"
"...반갑다! 김성호! 부소대장이다!"
".....ㅅ상경! 김성호!..반갑습니다!..."
15
"성호야"
"상경 김성호.."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그냥 장단만 맞춰주면 된다"
"예..알겠슴다.."
"철기 무전기 채널 중대랑 안겹치게 잘 맞춰놔라. 있다가 시간되면 무전 버튼 여러번 눌러서 신호 보내. 그럼 바로 무전 칠테니까"
"예..저기 부소대장님.. 근데 좀 위험한거 아닌지 말임다.."
"...위험할게 뭐가 있냐.. 그냥 철기 입에서 미안하다는 얘기만 듣고 끝날건데..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한테 피해가는거 하나도 없으니까"
"예..알겠슴다.."
"...철기랑은 많이 친해졌지?"
"...예...그렇슴다.."
"..도와줘서 고맙다 성호야!"
"아닙니다..."
"정민이도 하늘에서나마 위로가 많이 될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예! 알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