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소개팅 썰 1.txt (스압) [43]

12 구미베어 | 2020-12-30 13:49:26 | 조회 : 19614 | 추천 : +24


 

차가운 칼바람이 볼을 아프게 스치는 19년 12월 초였다. 

 

하지만 매서운 추위를 느껴 볼 바깥 약속도 없는 난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원룸 한켠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아프리카 방송을 틀어놓고 

 

무표정으로 채팅창에 "ㅋㅋㅋㅋㅋㅋㅋ" 을 치고 있었다. 무미건조하게 짝이없는 날들의 연속. 

 

 

그때 마침 보고있는 방송 위로 카톡 하나가 덮였다.

 

"혹시 너 소개팅 받을래?"

 

발신자는 평소 나를 좋게 보던 친한 형이었다.

 

 

주말에 집에만 박혀서 아프리카 방송만 보고 있는 날 한심스럽게 여긴건지 

 

아니면 평소에 내가 은근히 소개팅 시켜 달라고 흘린 덕분인지 나에게도 소개팅이란 걸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침대에서 흘러 내리듯 미끄러져 바닥에서 기쁨의 발차기를 하다 보고 있는 방송이 꺼졌다. 

 

그깟 방송이 뭐가 중요하랴.

 

당장의 무료한 기분만을 무디게 마취 시켜 줄,  찰나의 것은 내게 중요 치 않았다. 

 

때론 여자친구 처럼(여캠), 베프(롤 BJ) 처럼  항상 내 곁에 있어주었던 아프리카 방송을 이렇게 배신했다. 

 

웃기지만 난 그것들을 누구보다 싫어 했는지도 모른다. 

 

참 역설적이다. 가장 친하지만 누구보다 싫어했다라...

 

이 감정을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무튼 분수 마냥 치솟는 기쁨의 감정을 꼭 막으니, 곧 이성이 머릿속으로 찾아 왔다. 

 

"혹시 사진 있ㄴ,....."

 

그분의 사진이 있는지 막 카톡을 보내려는 찰나에 얼굴 사진이 전송 됐다. 

 

 

솔직히 그렇게 예쁘진 않았다. 

 

웃기게도 난 그 와중에 소개팅 녀의 외모를 스캔 하고 있었다. 

 

참 본능이란 무섭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 이런 자리가 그리운 사람이어서 외모가 만남을 방해 할 정도로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찌 얼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랴,

 

숨겨진 다른 매력이 있겠거니 하면서 나를 세뇌 시켰다. 

 

 

쓰던 카톡을 지우고 다른 내용을 써서 보냈다. 

 

"받아 볼게요 형"

 

"어 그래 번호 넘겨줄게, 32살이고 카드회사 다녀, 얘는 너 사진 보내기도 전에 받겠다고 하더라"

 

이 말을 들으니까 사진을 먼저 달라고 한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010-xxxx-28xx

 

 

처음으로 건내 받은 낯선 여성의 전화번호. 

 

사막에서 길 잃은 사람 마냥 막막했다.  

 

소개팅으로 전화 번호를 건내 받은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이런 막막한 기분이었을까....

 

아까의 설레던 감정이

부담감으로 바뀌면서 조금은 후회가 됐다.

 

'아 그냥 받지 말걸 그랬나.'

'뭐라고 얘기하지'

 

네이버에 소개팅 첫 카톡을 검색 해보았다.

 

"소개팅 첫 카톡 실수하지 않는법'

'호감을 사는 소개팅 첫 카톡'

'소개팅 첫 카톡 이렇게 시작해보세요'

 

인류애를 시전해 주시는 많은 인생의 선생님들 덕분에 

 

'젠틀한 인사와 함께 간단하고 짧게, 약속만 잡아라' 라는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블로그에 쓰여진 대로만 한다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번호를 저장하니 

 

어여쁜 튤립 꽃을 배경으로 한 새 친구가 생겼다.

 

'남자새끼가 쫄기는 뭐 어려운거 아니잖아, 네이버 블로그에서 본 대로만 해보자'

 

내 안에 이상한 자신감이 끓어 올라 당당히 1:1 메시지를 클릭했다.

 

텅 비어있는 메시지 창. 

 

그 깨끗함이 갑자기 나에게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하 시발...갑자기 막막하네'

 

그곳에 채워 넣을 우리의 얘기들이 졸작이 될지, 걸작이 될지는 이 첫 멘트에 달렸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가야바타 야스나리 의 '설국' 같은 걸작들도

 

단숨에 독자들의 이목을 끄는 도입부로 찬사를 받은 작품들이다.

 

그만큼 도입부는 중요하다. 

 

 

빈 채팅창에 

카톡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10분을 씨름했다.

 

결국, 머릿 속에 떠다니는 수 많은 멘트 중에서 무난 하지만 조금은 무미건조 한 것을 골랐다. 

 

"안녕하세요 00형의 소개를 받고 인사 드리게 된 000입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10분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하 병신아... 소개팅은 왜 받는다 해가지고, 이렇게 자존감만 깎이고 뭐하는거냐  진짜, 앞으로 소개팅 같은거 절대 받지마라.'

 

이렇게 내면을 자책하고 있을때

 

소개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 안녕하세요ㅎㅎ 저는 00이에요, 반갑습니다!"

 

카톡을 읽을까 말까 수십번을 고민했다. 

 

'바로 읽으면 없어보이겠지? 이 분은 10분 뒤에 보냈는데 나는 바로 보내야 돼? 

 

바로 보내고 싶긴 한데... 이거 뭐지 밀당인가? 유튜브에서 보니까 남녀 사이에 카톡으로 밀당할때

 

10 ~15분뒤에 읽고 보내라는데 그런 기술을 나한테 쓰는건가?''

 

수 많은 물음표가 담긴 문장들이 머릿속을 표류했다. 

 

 

결국 무수한 생각들 때문에 의도치 않게 나도 10분 뒤에야 보낼 수 있었다.

 

"아 네! 혹시 이번 주 토요일 점심에 신촌에서 시간 어떠세요? 금요일은 제가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진짜 금요일이 바빴냐고?  아니다. 난 되지도 않는 바쁜척을 섞어 보고 싶었다.

 

한가 해 보이면 한심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 듣곤 그걸 실천에 옮긴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날 시간이 된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우리의 대화는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며 끝났다. 

 

 

약속의 날인 토요일.

 

우린 오후 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워낙 길치에다가 방향치 까지 섞여있어서 사전에 약속 장소 답사를 위해 정오 쯤 일찍 그곳에 도착했다.

 

평소같으면 노스페이스 히말라야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녔을 바깥인데

 

멋을 좀 부린다고 발마칸 코트에 아페쎄 쁘띠 청바지를 입고 있으니까 진짜로 추위가 살을 에는것 같았다.

 

그치만 이 기분 나쁜 추위 조차 설렜다. 미친놈.

 

 

그렇게 소개팅 식당, 카페 까지의 동선을 미리 파악해 둔 뒤 

 

일을 마치곤 신촌 독수리 약국 앞에서 기다렸다. 

 

조금은 늦는다는 카톡이 12시 50분쯤 왔다. 

 

조금 늦는다길래 한 5분정도 늦을 줄 알았는데

 

10분이 되도 15분이 되도 나타나질 않았다.

 

기분이 나빠서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주선자 형 생각에 딱 1시 30분 까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20분쯤 지났을까? 카톡 하나가 왔다.

 

"저 도착했는데 어디계세요...?"

 

잔뜩 기분이 상해 있었지만 최대한 젠틀하게 독수리 약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카톡을 보냈다.

 

잠시 뒤 누군가 내 뒤에서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 보았는데 

 

사진과는 많이 다른, 엄청 예쁘고 키도 큰 사람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오랜 기다림으로 일어난 짜증이 행복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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