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세워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국가>>1권의 후반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이자 논쟁을 좋아하는 트라시마코스와 입씨름을 벌인다. 트라시마코스는 힘이 곧 정의라고 말한다.
트라시마코스 : 들으십시오! 저로서는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 자의 이득' 이외에 다른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재치있는(얄미운) 말로, 더욱 엄밀한 정의를 요구한다, 마치 권투선수에게 이익이 되니 근육보충제도 정의겠네? 라고 말하듯.
소크라테스 : 도대체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설마하니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말이오. 즉 팡크라티온 선수인 폴리다마스가 우리보다도 더 힘이 센데, 쇠고기가 이 사람의 몸에 이득을 가져다 준다면 이 식품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오.
트라시마코스 : 소크라테스 선생, 선생께선 정말이지 진저리 나는 분이십니다.
적어도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은 자기의 이득을 목적으로 삼고자 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다스림받는 자들에게 올바른 것으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 및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로서 처벌하지요.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이득으로 귀결한다. 즉, 여기서 강한 자란, 권력자 말씀이올시다.
소크라테스 : 이제야 선생의 말뜻을 알았소.
진정한 정치가의 의미를 검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유추의 기술을 사용합니다.
소크라테스 : 엄밀한 뜻의 의사는 돈벌이를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인가요?
트라시마코스 :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 : 의술은 몸에 이득이 되는것을 생각하오. 말을 키우는 기술도 말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생각하오.
트라시마코스 : 예
소크라테스 : 그 어떤 전문적 지식이라도 더 강한 자의 이득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를 받는 자의 이득을 생각하며 지시하오. 그러면 그 어떤 의사든, 그가 의사인 한은, 의사에게 이득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환자를 위해 그러지 않겠소? 엄밀한 뜻의 의사는 몸을 관리하는 자이지, 돈벌이를 하는 자가 아니니까요. 그가 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주게 되는 쪽에 이득에 되는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이렇게 정의란 통치자(강한 자)의 이익을 위한것이라는 주장을 소크라테스는 반박합니다. 대충 '제 잇속을 차리는 양반은 제대로 된 통치자가 아니다' 라고 읽힌다. 그런데 트라시마코스가 보기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주장으로 보였나보다. 이어지는 트라시마코스의 반박은 인신공격에 가깝다.
트라시마코스 : 선생께는 보모가 있기나 합니까? 코찔찔이인 선생을 보모가 유심히 볼 뿐, 코를 닦아주지도 않으니까요.
선생은 양도 양치기도 알아보지 못하니까요. 양을 치는 이들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한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것들을 살찌게하고 돌보는 것이 주인한테 그리고 자신들한테 좋은 것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염두에 두어서라고 생각하시니 하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엄밀한 의미를 따져 반박에 나선다.
소크라테스 : 그러나 양을 치는 기술에 있어서 관심사는 양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공토록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님이 분명하오. 이를테면, 의술은 건강을 제공하고 다른 기술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어떤 사람이 치료를 해주고서 그 수가를 받는다면, 의술을 보수획득술로 부르겠소?
그런데 이에 앞서 트라시마코스가 꺼냈던 이야기가 있다. 나쁜 놈일수록 잘사는 세상이 맞지않은가? 현실을 직시하라는것이다.
트라시마코스 :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 중의 일부를 어떤 사람이 몰래 해내지 못할 때, 그는 처벌을 받고 비난을 받습니다. 신전 절도범이나 납치범, 가택 침입강도나 사기꾼, 도둑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못된 짓들에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에 대하여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땐, 이들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 받은 사람이라 불리지요.
소크라테스 선생, 이처럼 불의가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래, 트라시마코스 선생, 선생에겐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들로 생각되오?
트라시마코스 : 그렇습니다. 실로 올바르지 못함을 완벽하게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나라들과 부족들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사람들이면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선생께선 제가 소매치기 따위를 두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겠죠. 하기야 그런 것도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득이 되죠. 그러나 그런 건 언급할 가치도 없고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그런 것들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보다 낫다고 트라시마코스는 주장한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묘사는 오늘날 보기에도 생생한 느낌이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까다로운 논변을 펼친다. '불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까? 소크라테스는 악기 조율하는 기술부터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 여보시오, 음악에 능한 어떤 사람이 리라를 조율할 때, 현을 죄거나 늦춤에 있어서 역시 음악에 능한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하거나 또는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길 것으로 선생한테는 생각되오? 악기 전문가끼리는 서로 같은 음정을 내지 않겠소? 그러면 의술에 능한 사람은 어떻소? 이 사람은 의술에 능한 다른 사람이나 또는 그 처방에 대해 능가하고자 할 것으로 생각되오? 남들을 능가하고자 엉뚱한 처방을 내린다면 제대로 된 의사가 아니지 않겠소?
요컨데 전문 지식이 있는 실력자들끼리는 서로를 능가하려하지 않고, 반면 잘 모르고 실력 없는 이는 전문 지식이 있건 없건 누구나 이기려 든다는 것이다. 그럼 정의로운 자 vs 올바르지 않은 자의 경우는?
소크라테스 : 그럼 이렇게 말할까요? 올바른 사람은 저와 가튼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같지 않은 사람(올바르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같지 않은 사람(올바른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 한다고 말이오. 불의한 자는 아무나 이겨 먹으려고 들던데 어떻소?
결국 '불의가 정의보다 현명하고 훌륭하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반박한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불의한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보다 강력하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소크라테스 :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올바르지 못함이 강력하다고도 말했소. 선생은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있어서,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하려 시도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많은 나라를 휘하에 속국화하여 가지고 있다고도 보오?
트라시마코스 : 물론입니다. 그거야말로 가장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하게 될 일이죠.
소크라테스 : 선생은 나라나 군대,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 또는 다른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하게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에, 만약에 그들이 자기네들끼리 서로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 일을 그들이 조금인들 수행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오? 자기네끼리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겠소? 한결 더 잘해낼 수 있지 않겠소?
소크라테스는 최소한의 정의 없이는 강력한 나라나 강력한 집단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아예 힘이고 뭐고 없다는것이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은 결국 행복하다는 명제를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소크라테스 : 올바른 혼과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게 살게 되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게 될 것이오.
트라시마코스: 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게 되겠네요.
소크라테스 : 그러니까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오.
트라시마코스 : 그렇다고 해두죠.
어떻게 읽었는가? 읽은 이 중에는 뭐 이렇게 순진해? 현실의 쓴맛을 모르는 거 아냐? ..라며 못마땅해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플라톤만큼 험한 꼴 많이 목격한 철학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 사람이 멜로스 사람에게 몹쓸 짓을 했단 것도 알았고, 다음엔 자기네 아테네가 스파르타 사람한테 몹쓸 짓 당하는 꼴도 겪었으며, 그러고 나서도 아테네 사람들이 자기 스승 소크라테스를 부당하게 죽이는 꼴도 직접 봤다. 플라톤은 나름 단맛 쓴맛 보고 나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100% 동의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 책이 나온 지 벌써 2천년도 넘었다. 어쨋든 이 책들은 서구에서 '정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문헌이다. 이후 2천 수백 년 동안, 서구에서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할때면 언제나 이 책들이 언급된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 원문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