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여러 사건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광기에 휘말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광신도이기 때문일까? 예 라고 냉큼 대답하고 넘어가기엔, 생각해볼 문제가 많다. 평범한 사람이 어쩌다 학살에 가담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20세기의 고전이 된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바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뉴요커>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 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이히만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 대학살 당시 희생자들을 수용소로 '이동'시킨 담당자였다. 수백만 명을 저승행 열차에 태운 학살의 주요인물인 셈인데.. 이런 살인마는 도대체 어떤 작자였을까?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보고 세계는 당황한다. 법무장관 하우스너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살인에 대한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이며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그는 재판정에 서는 대신 정신병원으로 애초에 보내졌을 것이다.
괴물이라서 당황했을까? 아니다. 너무너무 멀쩡하고 평범한 사람이라 당황했다. 뿐더러, 소심하기까지 했다. 살인을 즐기기는커녕, 끔찍한 장면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 으로 판정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모든 정신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발표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해주었다.(2장)
'지금 제게 큰 상처를 보여준다면 저는 그것을 똑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고, 의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요? 여자와 아이들에게 군인들이 총을 갈겨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장면들을 볼 만큼 저는 강하지 않고 잠을 잘 수도 없으며 악몽을 꿉니다' 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6장)
이런 평범한 사람이 어쩌다 학살에 가담했을까? 증오심 때문일까? 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 친구도 꽤나 있었으며, 자신의 희생자들에 대해 어떠한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고, 게다가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그럼 그는 이데올로기나 신념을 가지고 학살 범죄에 가담한 것일까? 별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념을 가지고 나치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도 몰랐고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뭐' 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그는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밝혔지만, 그 이유도 범속했다.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신화였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주된 기준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는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관에서 거의 8천만에 달하는 독일 사람의 총통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히틀러,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한테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왠지 주위에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 아닌가? 뭐, 아무튼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감싸기 위해 이 글을 썼을까? 아니다. 그가 얼마나 평범한 속물이며 악이 어느정도로 평범할 수 있는지를 지적했을 뿐이다.
'나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 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이아고, 맥베스, 리처드3세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등장하는 악역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상투적인 진부한 말을 사용하는 습관에 주목합니다. 아이히만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없었고, 아이히만은 구호와 관용구에 쉽게 감염되었다.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라, 다만 자기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였다. 그런데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아이히만 재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의 말을 오래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말하는 데 무능력하다는 것은 생각하는 데 무능력하다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언어와 다른 사람의 현존을 막는, 즉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었다.' 아렌트는 이를 '상상력의 결여' 라고 부른다. 아이히만의 결정적 성격 결함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소..소시오패스?
그의 양심에 대해, 그는 자신이 명령 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남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시키는 대로 복종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법! 의무! 명령! 을 따랐다.
아이히만은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무엇이든 느낄 필요를 상실하였다.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기초한 이 땅의 새로운 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 할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나치스의 살인자들은 사디스트나 천성적인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기만을 통해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아이히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일까? 아렌트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나치에 부역한 사람들, 나치에 침묵한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즉 재앙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재발할 가능성에 대해 말하자면, 근대의 인구 폭발과 기술적 장치들의 발견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두려운 사실, 게다가 기술적 장치들은 자동화를 통하여 그 인구의 많은 부분들을 '잉여'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또 핵 에너지를 통하여 마치 히틀러의 가스 시설을 사악한 아이들의 서투른 장난감처럼 보이게 만드는 도구들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 등은 우리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