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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남혐(?)의 시대, 문화 전쟁으로는 못 이긴다"

하사 눈마새 | 25-07-11 09:55:17 | 조회 : 56 | 추천 : -


조던 피터슨과 나눈 대화

/데이비드 프렌치 뉴욕타임스 논설위원



image.png NYT "남혐(?)의 시대, 문화 전쟁으로는 못 이긴다"

지난주, 조던 피터슨과 미국 젊은 남성들의 곤경을 주제로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그는 민주당의 남성 유권자 확보 문제를 다룬 내 뉴스레터를 읽고 자신의 팟캐스트에 나를 초대했다. 그 뉴스레터는 내가 만난 한 젊은이에게 피터슨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대화는 전반적으로 흥미로웠지만, 특히 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보는지, 그리고 왜 정치적 논쟁이 격렬해지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피터슨과 나는 여러 지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수백만 젊은 남성이 겪는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점도 그중 하나였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휘청이며 뒤처지고 있다. 물론 포춘 500대 기업 CEO가 대부분 남성이듯 사회 최상층에서는 남성이 여전히 건재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남성은 학업 성취도에서 여성에게 뒤처지고, 정신 건강 문제로 더 많이 고통받으며, 여성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왜일까. 이제 남성의 고난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명백한 현실이 됐다. 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이해해야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팟캐스트 초반, 임상 심리학자인 피터슨은 소위 ‘이념적 설명’을 제시했다. 남성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남성을 혐오하거나 근본적으로 결함 있는 존재로 보는 악의적 세력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남자애치고는 정말 잘한다"고 들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피터슨이 보는 젊은 남성들의 고난은 문화 전쟁에 뿌리를 둔다. 그는 "교사 대다수가 여성일 뿐 아니라, 아이들을 유아 취급하는 급진 좌파 여성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자아이들은 본성과 맞지 않게 몇 시간씩 앉아 있도록 강요당하며, 특히 활동적인 아이는 ADHD 진단을 받고 메틸페니데이트(각성제)를 처방받는다.

그는 젊은 남성들이 "경쟁은 나쁘다", "야망은 병적이다", "결혼은 억압적 제도다", "남성의 활동이 지구를 파괴한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이념적으로 급진화되어 체계적으로 남성을 약화시키는 학교 문화를 그린 것이다.

피터슨의 말을 전부 무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1990년대 어린 소년들 사이에서 리탈린 처방이 급증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쉬는 시간이 줄고 '건전하게' 변질된 것도 안다(내가 어릴 땐 쉬는 시간에 미식축구를 했지만, 오늘날 많은 학교에서 금지됐다). 터무니없게도 피구를 금지하는 교육구도 많다.

하지만 그의 설명이 과연 남자아이들이 학교에서 힘들어하는 주된 이유일까. 피터슨 역시 이를 유일한 원인으로 제시하진 않았지만, 그의 설명은 증거는 물론 수백만 남성의 경험과도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피터슨이 말하는 동안, 나는 아들을 키웠던 테네시의 시골 마을을 떠올렸다. 과거 세대보다 쉬는 시간이 짧고 차분해졌다는 점을 빼면, 피터슨이 설명한 현상 중 어느 것도 우리 아들이나 또래 아이들의 삶에 적용되지 않았다.

아들의 선생님 대부분은 여성이었지만, 거의 모두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약물 처방 유행은 끝났고, 격렬한 스포츠를 기피하기는커녕 미식축구를 사랑하는 지역 사회는 경쟁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이것이 미국 시골의 삶이다. 종교적이고, 보수적이며, 특히 격렬한 신체 접촉이 있는 스포츠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미국 시골 남성들은 가장 진보적인 대도시에 사는 남성들보다 훨씬 더 힘겹게 살아간다. 예컨대 '절망으로 인한 죽음'은 시골 지역에서 더 심각하다. 하지만 시골은 소위 '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가 그토록 혐오하는 '깨시민(woke) 바이러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곳이다.

젊은 남성의 위기에는 다른 가설이 존재한다. 이념보다는 기술과 훨씬 더 관련이 깊다는 주장이다. 산업 혁명과 정보화 시대는 우리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우리는 여전히 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에 적응하는 중이다. 탈산업화와 정보화 시대는 문화 전쟁의 어떤 요소보다 남성에게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 및 정보 혁명에 강대국 간 갈등 완화와 냉전 종식이 더해지면서, 공장은 더 적은 노동자를, 군대는 더 적은 군인을 필요로 하게 됐다. 농장은 고도로 자동화됐다. 완력의 필요성도, 거대한 보병 부대에 대한 의존도도 줄었다.

물론 현대 생활에서도 완력은 여전히 필요할 수 있지만(텍사스에서 165명을 구한 영웅적인 해안 경비대 구조대원이 떠오른다), 지력이야말로 위대한 평형 장치다. 동시에 피임 기술의 발달은 여성이 가족 규모를 조절하고 인생의 황금기에 경력을 추구할 자유를 줬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남성은 가정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축소됐다고 느끼게 됐을 뿐 아니라, 남성 롤모델을 만나고 남성 문화를 접할 남성만의 공간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는 여성의 것이다" 같은 구호를 들으면, '이 새로운 세상에서 내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정당한 의문을 품게 된다.

과거 젊은 남성은 주변 환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남성성을 배웠다. 남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혼란이 없었다. 이제 의도적으로 어린 소년들에게 남성성을 주입시켜야 한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와 남성적 정체성을 찾는 법을 의식적으로 가르쳐야만 한다.

물론 이념과 정치가 남성의 곤경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상황을 좋게 만들 수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의 과잉 처방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남성 문제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 문화 전쟁의 결과가 젊은 남성들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제를 주로 이념의 틀로 본다면, 문화 전쟁을 무시하는 건 사악한 짓이다. 더 깊고 체계적인 변화를 위해 (남성을 위한) 온라인 싸움을 외면한다면, 즉 리처드 리브스의 저서 '소년과 남자에 대하여(Of Boys and Men)'의 표현을 빌려 '문화 전쟁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다면, 남성들이 가장 필요할 때 전장을 떠나는 셈이다.

반대로 관점이 주로 기술적, 경제적, 역사적인 것이라면, 문화 전쟁에 집중하는 것은 본질을 흐린다. 문화와 싸우느라 정작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지원할 제도적 방안에 대한 체계적 사고를 희생하게 된다. 교육계에서 모든 급진 좌파를 몰아낸다 해도, 경제와 기술의 현실은 그대로다.

미국 정치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치인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수백만 미국인들은 정치인과 정당이 남성을 구원하고, 교회를 구하고, 인종차별을 끝내고,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을 제공해주리라 기대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드러나면, 유권자들은 좌절하고 양당 담합체나 체제 탓을 하며 점점 더 극단적이고 위험한 정치인과 사상에 기운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문화 전쟁에 기대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정당은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온라인에서 상대를 공격하며 지지층을 구축할 수 있다. 선거에서 이기면, 권력을 휘둘러 적을 응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삶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방식을 영구적으로 바꿔놓은 경제적, 기술적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지구상에 우리 세상을 뒤바꾼 지각변동 같은 기술적 변화를 되돌릴 정치 운동은 없다.

진보주의자들을 물리치는 것이 남성성 번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대안은 무엇일까. 나는 리브스가 제시한 여러 제안이 마음에 든다. 예를 들어, 남자아이의 뇌 발달이 여자아이보다 조금 더디다면, 입학을 1년 늦춰볼 수 있다. 남자아이에게 더 많은 남성 멘토가 필요하다면, 교사를 포함한 돌봄 직업에 더 많은 남성을 의도적으로 모집해야 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남성의 쇠퇴를 되돌리려면 포괄적인 제도적, 개인적 대응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가 중요하지만, 정책 변화만으로 이 거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는 없다.

남성의 본능과 충동을 본질적으로 '유해하다'고 취급해서는 안 되지만, 전통적 남성성을 찬양하는 것만으로 남성들의 병폐를 치유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미국에서 가장 남성적인 장소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마을이나 학교, 교회가 '깨어있게'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군분투하는 젊은 남성들을 돕고자 하는 피터슨의 열망을 존경한다. 하지만 문화 전쟁은 거짓된 희망을 제시한다. 분노와 소외감에 빠진 젊은 남성들이 이념 전쟁에서 승리한들, 그토록 갈망하던 의미 있는 직업이나 관계를 얻지 못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프렌치는 법, 문화, 종교, 무력 분쟁에 관해 칼럼을 쓴다. 그는 이라크전 참전 용사이자 전 헌법 소송 변호사다. 가장 최근 저서로는 '분열된 우리: 미국의 분리 위협과 국가를 회복하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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